근대사회와 봉건사회의 변질

근대사회와 봉건사회의 변질

유럽의 근대사회는 봉건사회 그 자체에서 성립되기 시작하였다. 즉, 유럽의 봉건사회는 11∼12세기경부터 크게 변질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11세기 말부터 시작된 십자군운동이 촉진제가 되었다. 이러한 변질을 나타내는 중요한 현상으로는 우선 경제적 근대화를 들 수 있다.

① 도시의 발전:십자군 이후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지중해 무역과 저지대(低地帶)를 중심으로 하는 발트(북해) 무역이 발전함에 따라 2개의 무역권을 연결하는 내륙의 상업로(商業路)도 발전하게 되어 이탈리아·독일·플랑드르·샹파뉴 등지에 도시가 번영하였다.

② 부역(賦役)의 소멸과 지대(地代)의 금납화(金納化):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화폐경제가 진전함에 따라 영주들은 비능률적인 부역 대신 공납징수(貢納徵收)를 강화하더니 이윽고 농민으로부터 직접 화폐를 입수하고자 생산물지대(生産物地代)를 화폐지대로 바꾸었고, 약간의 해방금(解放金)을 받고 농노(農奴)의 신분을 농민으로 해방시켰다(농노해방).

③ 농민 반란:농민층의 일반적인 상승 기운에 대하여 영주들은 농민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고 부역의 부활을 도모하는 등 봉건강화(封建强化)를 강행하였으므로, 이에 대항하는 농민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농민반란은 대부분 진압되었지만 농민들의 자립적 경향이 강해져서 농민들은 차차 봉건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장원제도(莊園制度)도 해체되어 갔다.

길드(guild)의 변질:농민층의 일반적인 상승과 함께 농촌의 수공업이 발달하고 도시의 수공업자 길드의 독점적 지위는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한편, 도시 길드의 내부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주장(主匠:master) 간의 대립과 주장과 직인(職人:journeyman)과의 대립이 격화되었으며, 특히 그 때까지만 해도 길드와 관계가 없던 상업자본가들이 상당한 세력으로 도매체제(都賣體制)의 지배를 강화하여 길드는 본래의 성격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정치적인 면에서의 변질로서는, ① 로마 교황권의 쇠퇴:십자군운동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교황권의 정신적 권위가 현저히 손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세속적 지배권도 또한 쇠퇴하였다. 본래 교황의 세속적 지배권은 봉건 제후(諸侯)로 하여금 세습적인 황제나 국왕과 대립하도록 조정함으로써 권력이 유지되어 왔으나, 십자군운동 이후 제후나 기사들이 몰락하였고, 반대로 국왕의 권력 강화(집권화)에 의하여 교황의 세속적 지배권은 쇠퇴하였다. 게다가 교황의 이른바 아비뇽 유수(Avignon 幽囚:1309~l377)와 교회의 대분열(1378~1417)에 의해서 그 쇠퇴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 각지에서 이단운동(異端運動)이 일어나 교회의 혁신, 더 나아가서는 교황의 권위마저 부정하는 경우도 나타나 종교개혁의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② 중앙집권 국가의 형성:십자군운동으로 전사·도산(倒産) 등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중소영주(中小領主)인 기사나 제후들이었다. 게다가 총포의 사용 등 전술의 변화로 기사의 존재가치가 무용화되면서 제후나 기사들은 점차 국왕의 신하로 변신하였다. 한편, 이에 따라 대두된 도시의 상인자본가들도 지방분권적인 봉건적 지배체제가 상업발달을 저해하는 것이라 하여 국내의 통일과 중앙집권화를 실현하려는 국왕의 노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이리하여 14∼15세기경부터 유럽 각국에서는 점차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형성되어 근대국가로서의 길이 열렸다.

참조항목

근대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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