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의 역사

에티오피아의 역사

메네링크 2세 황제 궁전

메네링크 2세 황제 궁전

에티오피아가 다른 아프리카 나라들과 달리 두드러진 특색을 가지고 있는 것은 3,000년에 이르는 역사 때문이다. 3,000년 전은 솔로몬 왕 시대로, 시바의 여왕이 지혜 겨루기에 져서 솔로몬왕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메넬리크 1세가 에티오피아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시바는 남아라비아의 나라였으나 홍해를 건너 북에티오피아로 이주한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이주한 후에도 시바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므로, 에티오피아의 역사학자들은 시바의 여왕이 예루살렘에 간 것은 에티오피아에서라고 주장하나 증거는 없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제국헌법은 이것을 사실(史實)로 하여 메넬리크 1세부터 하일레셀라시에 1세 황제까지 왕통이 연면하였음을 규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식은 국가통일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주었다. 남아라비아로부터의 이주민은 에티오피아에 고도의 문화를 들여와 강대한 제국을 이룩하였다. 이 제국은 악숨시(市)를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악숨 제국이라 불렸다.

악숨 제국은 정치적으로는 홍해를 건너 남아라비아를 영토로 삼아 메카에 따라갈 정도로 크게 세력을 떨친 때도 있었으며, 또 문화적으로는 아프리카 유일의 문자를 만들어낼 정도까지 발전하였다. 이 문자는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악숨 제국은 이슬람 발흥으로 쇠퇴하고 사막은 이슬람의 세력하에 들어갔으나, 고원에서는 악숨 제국으로부터 이어받은 그리스도교 문화와 제도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에티오피아 고원의 상부가 외세의 지배를 받은 것은 16세기에 이슬람교도에 의한 14년간, 20세기에 이탈리아에 의한 5년간뿐이다. 이 기간 중에도 황제는 존속하였다. 다만 ‘황제’에 상당하는 에티오피아어(語) ‘제왕(諸王)의 왕’이라는 표현은 3세기까지밖에 소급할 수 없으며, 이보다 앞선 시대는 ‘왕’이라는 표현만이 사용되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1974년 소령 H.M.멩기스투의 쿠데타로 황제 H.셀라시에가 폐위되는 등 왕정이 붕괴되고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어 임시군사평의회(PMAC)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군사정권은 헌법의 정지, 상·하원의 해산, 고위인사의 처형, 사법 및 교육제도 개혁, 농지개혁, 금융기관 및 보험회사 등 주요산업의 국유화 등을 단행하였다.
 
1977년 멩기스투는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1984년 9월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에티오피아 노동당(WPE)이 공식 출범하였을 때 의장에 선출되었다. 소련식 공산당을 모델로 11명의 정치국원과 136명의 중앙위원이 선출되었으며, 1987년 2월 국민투표에서 81%의 지지를 얻어 헌법이 통과되고 6월 총선에서는 885명의 의원이 선출되었다. 9월 의회는 군사평의회 해체를 선포하고 24명으로 구성되는 국가평의회를 구성하였다. 이로써 1974년 이후 지속된 군사정부는 13년 만에 민간정부로 이행되었다.
 
1988년 의회는 5개의 자치지역(에리트레아, 티그레, 아사브, 디레다와, 오가덴)과 25개 행정지역을 두고 그 산하에 356개 소지역을 설정하여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그러나 멩기스투 정권은 경제사정의 악화와 장기간에 걸친 반정부세력의 저항으로 권력기반이 약해졌으며, 1990년 소련의 지원이 중단되자 정권붕괴의 위기에 처했다. 이에 시장경제제도를 도입하는 등 과감한 개혁정책을 단행함과 동시에 1990년 3월 에티오피아노동당을 에티오피아민주통일당(EDUP)으로 고치고, 비(非)마르크스주의자도 당원이 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러나 1991년 2월 정부군과 반군세력 사이의 평화협상이 결렬되고 무력충돌이 격화되어 4월에는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이 주요도시를 장악하였으며, 5월 멩기스투가 국외로 탈출한 가운데 반군 세력이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1974년 군사쿠데타 이후 17년간 지속된 사회주의 정권이 붕괴되고 다당제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신정권이 수립되었다. 1991년 7월 반군세력은 국민평의회를 구성하고, EPRDF의 지도자 멜레스 제나위(Meles Zenawi)를 과도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각 지역에 할거하고 있는 반군세력들간의 갈등과 인종간의 대립으로 신정권의 권력기반은 취약한 편이다. 특히 오로모 지역 반군세력과 정부군의 무력충돌이 계속되었다.
 
한편 1962년 에티오피아에 강제 합병된 이후 분리 독립을 요구하며 30년간 투쟁해 온 에리트레아 지역은 1991년 5월 멩기스투 정권이 붕괴한 틈을 타 대대적 공세를 감행하였다.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전선(EPLF)이 중심이 된 8만 5000여 명의 반군세력은 지역 중심도시 아스마라를 점령하고 자치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어 1993년 4월 23일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감시하에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99.8%의 압도적인 지지로 분리 독립을 결의하였다. 같은해 5월 23일 다당제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독립주권국가 에리트레아의 수립이 선포되었으며 초대 대통령에 아프웨르키가 선출되었고, 에티오피아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았으며 UN에도 가입하였다.

에티오피아는 1994년 신헌법을 제정하고 내각책임제와 연방제를 채택하였으며 1995년에 총선을 실시하여 네가소(Negasso)를 에티오피아연방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멜레스 제나위(Meles Zenawi)가 2000년 5월 제2기 총리로 재선출되었다. 2001년에는 학생 시위로 네가소 대통령이 사임하고 당해 10월에 기르마 월데 기오르기스(Girma Wolde Giorgis)가 임기 6년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2005년 5월 제3차 총선이 실시된 후(소말리주는 8월에 총선 실시), 집권당인 EPRDF가 과반수를 넘는 327석을 획득하였으나, CUD, UEDF 등 야당은 정부측의 투개표 부정에 항의하는 반정부 활동 전개했다. 2005년 6월 아디스 아바바 대학생 등 반정부 시위, 경찰 발포로 40여명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05년 10월 멜레스 정부가 공식 출범했으나, CUD 등 야당 일부는 정부출범식 등원을 거부하고, 연립정부 구성, 선관위의 개편, 야당 구금인사의 석방 등을 요구하였다. 2005년 11월 아디스 아바바 및 전국 주요도시 전역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여 시위자 등 50~60명이 사망하고, 야당당원 및 시위가담 혐의자 등 1만 명 이상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