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자본주의 성립과 발전

대한민국 자본주의 성립과 발전

개화사상가(開化思想家)로 알려진 유길준(兪吉濬)은 《서유견문, 西遊見聞》에서 이미 한국에는 오늘날의 주식회사나 합자회사와 같은 사회기업의 제도가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장통사(長通社)·연무국(煙務局)·보영사(保社)·혜상국(惠商局)·장춘사(長春社)·광인사(廣印社) 등이 그 본보기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사례로 미루어 개항기(開港期)에는 상공업 분야에 근대적인 경영방식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시발점으로, 1906년 7월에 있었던 광업법(鑛業法)의 공포를 개항의 완결점으로 볼 수 있다. 1896년 미국이 운산금광(雲山金鑛)의 개발권을 가졌고, 뒤이어 독일·영국·일본 등의 자본이 광업 분야에 진출하였다.

광공업 분야에 선진국가의 자본이 밀려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상업 분야에 대한 진출은 더욱 뚜렷하였다. 이와 같은 외국인 상권(商權)의 신장 추세에 대처하기 위하여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서구식의 주식회사 형태의 상사회사(商事會社)를 설립할 것을 강조하였는데, 외국 자본의 진입과 그 신장 추세를 막기 위해서는 근대적인 상법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개항과 더불어 전통적인 천상적(賤商的) 신분제도가 해체됨에 따라 상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급격한 증가 추세를 보였다. 1912년에 이르러 한국인의 직업별 인구 구성은 농림업 인구 1,208만 2,520명에 비하여 상업 및 교통운송업 인구가 99만 365명으로 2위를 차지하였다. 3위는 공업 인구로 20만 8,315명이었으며, 자유업 인구가 17만 5,995명이었다. 개항기에 싹튼 상업 종사자의 인구 증가는 1912년에 이르러 농림업 인구 다음가는 비중을 차지하는 결과를 빚었다.

인천·부산·원산·진남포·목포·군산·마산포·성진·신의주·경성(서울)·청진 등 11개소의 개항장이 도시로 발전하여 촌락사회주도형(村落社會主導型)인 한국의 전통사회에 도시사회의 면모가 부각되었다. 개항장에는 촌락사회로부터 유입되는 인구이동 현상이 일어났고, 개항장에 유입된 한국인들은 상공업 등의 새로운 직업에 종사하는 임금노동자라는 직업인으로 변신하였다. 1922년에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공업에 종사하는 한국인 수는 35만 8,205명이고, 상업 및 교통업에 종사하는 한국인 수는 97만 1,195명으로 합계 132만 9,400명을 헤아렸다. 이 중에서 임금노동자로 일하는 한국인 수가 91만 8,603명(남자 88만 2,291명, 여자 3만 6,312명)이었으니 상공업 총인구수의 61.6%가 임금노동자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한말에는 민족자본을 투입, 의류품(衣類品)을 근대적 기계생산으로 직조하게 되어 1910년경까지 서울에서 기계적인 방법으로 의류품을 직조하는 공장 수가 38개소에 이르렀다. 직기대수는 면포(綿布)공장에 199대, 견포(絹布)공장에 29대, 교직물공장에 29대가 설치되었다. 직공 수는 면포 직조공장에 125명, 견포공장에 44명, 교직물공장에 40명이 취업하고 있었다. 이것은 기계적인 방법으로 의류품을 직조하는 이른바 작은 산업혁명의 성격을 지닌 역사의 한 토막으로 볼 수 있는 사실이다. 1923년에 경성상공회의소(京城商工會議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에는 11개소의 직포공장이 운영되고 있었다.

주요 직포공장의 경영규모는 대창(大昌)무역주식회사가 20만 원의 자본금에 종업원 수 60명이었고, 1911년에 설립된 경성직유회사(京城織維會社)는 15만 원의 자본금에 종업원 수 108명이었으며, 1911년에 설립된 경성직물공사(京城織物公司)는 20만 원의 자본금에 81명의 종업원을 거느리는 규모였다. 1910년경에 설립된 38개소의 직포공장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으나, 다만 종로 상인들이 경영한 동양염직회사(東洋染織會社)만이 잔존하여 직포 업계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직포업이 처음부터 한국의 민족산업으로 발판을 굳히고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1911년에 설립된 경성직유회사는 1917년에 이르러 김성수(金性洙)가 인수하여 역직기(力織機) 40대를 갖춘 근대적 직포공장의 체모를 갖추었고, 1919년 10월 경성방직주식회사(京城紡織株式會社)로 발전하였다. 한국의 민족자본은 발 빠르게 은행업의 경영에 진출하였다. 1897년 한국의 귀족층과 상인층을 상대로 일본인들이 은행업의 경영을 권유하여 한성은행(조흥은행의 전신)이 설립되었는데, 이때부터 1920년에 이르기까지 민족자본에 의하여 13개의 은행이 설립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접어들자 이들 민족자본 은행들은 강제로 조선상업은행(朝鮮商業銀行)과 조흥은행(朝興銀行)에 통합되었다. 그리고 은행업이 전비조달(戰費調達)의 창구로 이용됨에 따라 민족자본은 모조리 전쟁채권(戰爭債券)으로 휴지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