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종교개혁과 절대왕정

독일 종교개혁과 절대왕정

유럽 각국의 절대군주제

유럽 각국의 절대군주제

16세기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신앙운동에 머물지 않고 교회의 수탈에 지친 제후국과 농민을 자극하고 사회개혁으로 발전하여 유럽의 근대질서를 열었다. 그러나 독일은 종교개혁의 중심지로 구교(로마가톨릭교회)와 신교(프로테스탄트교회)간 극심한 갈등으로 30년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에 따라 독일은 국토가 황폐해지고 상공업 발전과 신대륙 발견을 위한 해상진출이 지체되었으며, 한자동맹도 쇠퇴하여 프랑스와 영국에 경제적으로 뒤처지게 되었다.

15세기 이후 로마교황청은 부족한 재정을 성직거래와 면제부 판매로 충당하였고, 1517년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수사이자 대학교수인 마르틴 루터95개조 의견서를 발표해 로마교황청과 교회를 비판하였다. 사태 해결을 위해 1521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주관한 보름스 의회(Diet of Worms)를 개최하였으나,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에 자극받아 1524~25년에는 알자스(Alsace)와 슈바벤(Swabia)에서 교회의 탄압에 저항하는 농민의 반란이 일었고, 뒤이어 튀링겐에서는 도시 하층민의 폭동이 일었다.

이후 1529년 슈파이어 의회(Diet of Speyer)에서 루터교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을 인정하면서 종교개혁은 독일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546∼1547년 가톨릭을 옹호하는 황제와 남부의 제후국 그리고 루터교 즉 신교를 지지하는 북부의 제후국간에 슈말칼덴 전쟁(Schmalkaldischer Krieg)이 벌어지고, 155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신구파 모두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독일에서 가톨릭과 신교간 갈등은 지속되었고 가톨릭으로 국가를 통합하려는 신성로마제국의 페르디난트 2세에 반발하여 1618년 보헤미아에서 신교도 반란이 일어났다. 보헤미아 반란은 국제적으로 비화되어 1618년부터 1648년까지 프랑스․스웨덴·덴마크까지 가담한 30년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전쟁은 종결되었으나 독일은 프랑스와 스웨덴에 주요 항구를 내주고 정치·경제적으로 무력화되었다.

17세기는 절대군주제의 시기로 독일 역시 강력한 군주가 탄생하였다. 1640년 군인왕(Soldier King)으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프로이센의 왕위에 올라 1648년 발트해 연안의 포메라니아(Pomerania)를 획득하고 군사·경제력을 증강하였다. 합스부르크 왕가 역시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군사·경제적으로 발전하여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의 침입에 대항하고, 중상주의 정책으로 급성장한 프로이센과 대립하였다.

프로이센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 전쟁에 개입하여 1740∼1748년 오스트리아계승전쟁, 그리고 1756∼1763년 7년전쟁 등 합스부르크 제국과 두 번의 전쟁을 치러 실레지아(Silesia, 슐레지엔)를 획득하였다. 한편, 프로이센을 비롯한 독일전역의 경제성장으로 1700년 1,700백만에 불과하였던 독일의 인구는 1800년에 2,400백만으로 증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