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절대주의 왕권의 성립

프랑스 절대주의 왕권의 성립

샹보르성관

샹보르성관

샤를 7세(勝利王)는 국토를 확보한 후 관료제를 정비하고 재정을 개혁하는 한편 상비군을 창설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 다음의 루이 11세(재위 1461∼83) 시대에는 최강의 귀족 부르고뉴 공가(公家)가 멸망한 데 이어 아르투아 백령(伯領)·프랑슈콩테·앙주·멘·프로방스도 왕령에 병합되어 절대왕권의 기초가 다져졌다. 그의 아들 샤를 8세는 브르타뉴를 합병하고 이탈리아와 전쟁을 벌였다. 루이 12세(발루아오를레앙家, 재위 1498∼1515) 와 프랑수아 1세(발루아-앙굴렘家, 재위 1515∼47) 때에도 전쟁은 계속되었으나 그러는 동안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가 유입되었다. 또 당시 신대륙과의 무역이 이루어져 자본주의 경제의 발달을 가져왔다. 이어 프랑수아 1세(1515∼47)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놓고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1세(나중에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와 다투어 패하였으며, 합스부르크가(家)와의 항쟁도 격화하였다.

한편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은 1520년경부터 프랑스에도 파급되기 시작하였으며, 장 칼뱅을 중심으로 하는 엄격한 칼뱅주의가 형성되었다. 칼뱅은 파리에서 추방되어 제네바로 피하였으나 국내에서는 신구 양파의 분쟁이 심해졌다. 16세기 후반에는 8차례나 종교전쟁(위그노전쟁:1562∼98)이 일어났다. 종교적 분열은 마침내 성(聖)바르톨로메오의 학살과 같은 대참사까지 야기시켰다. 1589년에는 앙리 3세가 암살되었고 성왕(聖王) 루이 9세의 후예 부르봉가(家)의 앙리 드 나바르(앙리 4세:재위 1589∼1601)가 왕위를 계승, 발루아왕조가 종식되고 부르봉왕조가 창시되었다.

앙리 4세는 스스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낭트칙령’(1598)을 반포하여 신앙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내란을 수습하였다. 그는 쉴리를 등용하여 프랑스의 재건에 힘썼으며, 캐나다에 최초의 식민지 퀘벡을 개척하고 부르봉왕조의 기초를 세웠으나 열광적인 구교도에게 암살되었다(1610). 그의 아들 루이 13세는 리슐리외를 재상으로 등용하여, 국내에서는 귀족 신교도를 억압하고 밖으로는 합스부르크가(家)에 대항하여 30년전쟁에 참가하는 등 절대왕권을 공고히 하였다. 이어서 루이 14세(재위 1643∼1715) 시대에는 유년기에 ‘프롱드의 난(亂)’(1648∼53)이 일어났으나 섭정모후(攝政母后:안도트리슈)와 재상 마자랭이 교묘하게 평정하고, 대외적으로는 피레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에스파냐에 대하여 우세한 위치를 유지하였다.

1661년 국왕의 친정(親政)이 시작된 뒤 재정총감(財政總監) 콜베르는 중상주의(重商主義)정책을 시행하여 부국강병과 해외식민에 노력하였다. 한편, 이 당시 베르사유 궁전을 중심으로 하는 궁정문화가 개화되고, 고전주의문학이 확립되었으며 파리에는 문학 살롱이 문을 열었다. 이리하여 루이 14세는 ‘태양왕(太陽王)’이라고 불렸으며, 프랑스는 유럽 최고의 문화국이 되었다. 이로써 17세기는 ‘루이 14세의 세기’라 불리게 되었으며, 부르봉 왕권은 국내외에서 이른바 ‘빛나는 군림(君臨)의 시대’를 맞이하여 절대왕권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대외전쟁(플랑드르전쟁·네덜란드침략전쟁·팔츠전쟁·에스파냐계승전쟁)과 낭트칙령의 폐기에 따른 신교도·상공업자의 망명 등으로 재정은 점차 악화되었다. 루이 14세의 증손인 루이 15세(재위 1715∼74)의 치세는 초기의 섭정(오를레앙公 필리프) 시대부터 파란을 안고 있었다. 존 로에 의한 경제개혁의 실패, 궁정의 재정낭비, 7년전쟁(아메리카·인도에서 일어난 영국과의 식민지 전쟁, 1756∼63)에 패배한 결과 식민지를 상실하는 등 국위가 실추되었다. 국내에서도 계몽사상이 침투, 신흥 부르주아지의 성장이 이루어져 ‘구(舊)제도(Ancien Regime)’를 타파하려는 조짐이 나타났다.

그의 손자 루이 16세(재위 1774∼92)는 우둔하고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지나친 낭비로 국민의 신뢰를 상실하였다. 튀르고·네케르 등을 등용, 재정 위기를 타개하려 하였으나 이 역시 헛되이 끝나고 1789년 5월 삼부회가 소집되었다. 곧 이어 제3신분 의원에 의해 ‘국민의회(國民議會)’의 성립이 선언되었으며, 7월 14일에는 바스티유 감옥이 시민에 의해 탈취됨으로써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