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롱드의 난

프롱드의 난

[ La Fronde ]

요약 1648∼1653년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의 내란.

모후(母后) 안 도트리슈와 마자랭을 중심으로 한 궁정파에 대하여 일어났다. 최후의 귀족의 저항이라고도 하고, 최초의 시민혁명의 시도라고도 한다. 프롱드(Fronde)란 당시 청소년 사이에 유행한 돌팔매 용구인데, 관헌에게 반항하여 돌을 던진다는 뜻으로 빗대어 쓴 말이다. 반란의 계기는 파리 고등법원을 중심으로 한 관직보유층(官職保有層:賣官制官僚)의 반절대왕정(反絶對王政)의 시도에서 비롯된다.

당시의 왕 루이 14세는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모후 안 도트리슈가 섭정으로서, 마자랭을 재상으로 기용하였다. 그들은 1648년 8월에 파리 고등법원의 강경파 평정관(評定官)을 하였는데, 그 소식이 전해지자 파리 시민들이 봉기하여 왕권에 저항하였다. 섭정 안은 부득이 파리 고등법원의 왕정개조안을 승인하였으나 다음해 1월에 반격으로 나와, 궁정을 생 제르맹 앙 레로 옮기면서 명장 콩데공(公)을 기용하여 밖으로부터 파리를 포위토록 하였다. 이 내전은 3월까지 계속되었다. 그 뒤 콩데공이 교만해지고 구귀족(舊貴族)의 준동도 가세되자 왕권은 콩데 등 3인의 공작을 체포하였다. 구귀족 등의 프롱드파는 부득이 남쪽으로 도피하여 파리와 거의 같은 때에 왕권에 저항했던 의 프롱드 운동에 가담하였다.

1650년 말에는 형세가 역전하여 3공작 체포건으로 궁정에 대한 비난이 격렬하였기 때문에 마자랭은 을 결의하고, 1651년 2월 콩데공 등을 석방하였다. 그때가 왕권이 가장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파리에 집결한 프롱드당은 고등법원과 콩데 등 구귀족파와, 랭스 대주교 보좌의 소시민파로 분열되어 서로 당파싸움을 일삼아 공동투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권이 다시 강화될 여유를 주었다.

1651년 가을, 파리에서 추방된 콩데공은 보르도로 도망쳤다가 그 곳에서 전비를 갖추고 1652년 4월에 궁정이 없는 파리로 입성하였다. 그러나 7월에 왕당파(튀렌)군에 패하여 파리에 소시민 등을 결속한 정권을 세운 것도 잠시로, 중산시민들의 반항을 받고 궁정군에게 패배하여 괴멸하였다. 왕실은 1652년 10월 파리로 돌아왔다. 최후로 남은 보르도의 반란도 다음해에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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