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4세

앙리 4세

[ Henri IV ]

요약 프랑스의 왕(재위 1589∼1610)이자 나바라의 왕(재위 1572~1589)으로 부르봉왕조의 시조이다. 가톨릭 세력과 화해하고 낭트칙령을 발하여 30년간의 종교내란을 끝냈으며 베르뱅조약으로 에스파냐와도 화의하였다. 재정 ·농업 ·목축 ·교통의 재건에 힘쓰고 캐나다에 최초의 식민지 퀘벡을 개척하였다.
앙리 4세

앙리 4세

출생-사망 1553.12.13 ~ 1610.5.14
국적/왕조 프랑스
재위기간 1589년∼1610년
활동분야 정치

부르봉왕조의 시조이다. 프로테스탄트로서 위그노전쟁에서 활약, 1572년 신구 양 교도의 화의를 다지기 위하여 프랑스 왕 샤를 9세의 여동생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결혼하였다. 그 직후인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의 학살 사건이 발생하자 궁정에 연금되어 구교로의 개종을 강요받았으나, 4년 뒤인 1576년 2월에 탈주하여 고향인 베아른으로 돌아온 뒤 다시 신교도의 수령으로 활약하였다. 성격이 호쾌 활달하며 무술 ·전술에도 뛰어나 1585년 이후 신교도군을 이끌고 북상, 1589년 앙리 3세가 죽은 뒤 즉위하여 부르봉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구교도는 그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아 에스파냐의 침입을 받기도 하였다.

1593년 다시 개종하여 가톨릭 세력과 화해하였으며, 1598년 낭트칙령(勅令)을 발하여 신교도의 권리도 보장함으로써 30년간 계속된 프랑스의 종교내란을 종식시켰다. 또한 그해 베르뱅조약을 맺어 에스파냐와도 화의하였다. 정치에서는 신교도인 M.B.쉴리를 기용하여 재정 ·농업 ·목축 ·교통의 재건에 힘쓰는 한편, 캐나다에 최초의 식민지 퀘벡을 개척하였다. 1610년 프랑스의 안전과 영구평화의 유지를 위하여 그리스도교 국가의 국제연맹을 결성하려는 이른바 ‘대계획’을 추진하였다. 대계획의 날짜를 5일 앞둔 5월 14일 쉴리 공작에게 문병가는 도중 파리 페롱네리 거리에서 구교도 광신자의 칼에 찔려 죽었다. 비극적인 죽음으로 생을 마쳤으나, 프랑스에서 가장 사랑받는 왕의 한 사람으로서 수많은 로맨스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