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회

프란치스코회

[ Franciscan Order ]

요약 1209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프란시스코)가 창립한 탁발수도회(托鉢修道會).
프란체스코회 수도원

프란체스코회 수도원

구분 수도회
설립일 1209년
설립목적 그리스도의 사랑 전파
주요활동/업무 설교, 평화운동, 구라사업, 기타 자선사업
소재지 이탈리아

1209년에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에 의해 ‘작은 형제회’로 창설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승인을 얻어 복음을 받들고, 특별히 청빈정신을 주창하며 편력설교(遍歷說敎)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탁발수도회로 출발했다. 프란치스코 자신은 자연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으며, 청빈을 부정적 금욕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환희로 돌려 수도생활의 이상을 실현했다.

창립 초기에는 프란치스코의 행동이 곧 회칙이 되었지만, 수도회가 발족한 지 10년 안에 회원수가 5,000명이 넘으면서 회칙을 제정하게 되었다. 1223년에 최종 확정된 회칙이 교황 호노리우스 3세의 승인을 얻었다. 수도회는 1세기 사이에 놀랄 만한 성장을 거듭하여 1300년 전후에는 회원이 3∼4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청빈’의 해석을 둘러싸고 내부 갈등이 생겼고, 그 결과 ‘엄격파’와 ‘온건파’, 그리고 ‘이완파’ 사이에 논쟁이 벌어짐으로써 분규가 계속되었다.

13세기 후반에 프란치스코회의 제2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보나벤투라(Bonaventura)가 총회장직을 맡으면서 수도회 영향력은 전 유럽에 미쳤으며, 시리아아프리카 등지에까지 선교사가 파견되었고, 파리와 옥스퍼드 등에 있는 수사들의 집을 기반으로 신학교가 세워졌다. 그러나 청빈의 실천을 두고 회칙엄수파와 온건파 사이의 갈등은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며, 교황 레오 13세 때인 1897년 양파가 통합되어 관구(管區)의 합병과 개편이 이루어졌다.

종래의 수도사가 주로 농촌을 그 기반으로 삼은 데 비해, 이 탁발수도회는 도시를 무대로 활동하면서 전통적으로 설교·평화운동·구라사업(救癩事業) 및 기타 자선사업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또한 성탄절의 구유, 십사처(十四處), 삼종기도 등 가톨릭교회의 여러 의식을 정착시켰다. 보나벤투라, J.둔스스코투스(J.Duns Scotus), 윌리엄 오브 오컴(William of Ockham) 등 스콜라철학의 학자들을 배출했고, 해외선교를 통해 교육과 학문 분야에 많은 기여를 했다. 제2프란치스코회(클라라관상수녀회), 재속형제회(在俗兄弟會)인 제3프란치스코회가 있다.

한국에는 1937년 9월, 캐나다 관구 소속의 수사 두 사람이 파견되어 대전광역시 목동에 자리잡고 ‘작은형제회’를 설립함으로써 시작되었으나, 일제강점기6·25전쟁으로 폐쇄되었다가 1955년에 다시 입국했다. 1969년에 한국 준관구로 승격되었고, 1987년 12월에 한국 진출 50주년을 기념하여 총본부로부터 ‘한국 순교성인 관구’로 인가받았다.

한국의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는 성소계발 및 본당사목 외에도 나환자복지·노인복지·빈민복지·재가복지 등 복지사업을 펼친다. 또한 카자흐스탄·일본·중국·러시아 등의 해외 선교사업도 활발히 하고 있으며, 본부에서는 수도자신학원과 프란치스코 사상연구회를 운영한다. 2000년 현재 전국에 17개 수도원이 운영되고 있으며, 본부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