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1세

표트르 1세

[ Pyotr I ]

요약 러시아 로마노프왕조 제4대의 황제(재위 1682∼1725). 튀르키예의 요새 아조프를 공격, 차지하였고 총병대(銃兵隊)의 반란 진압을 계기로 러시아의 모든 관습 ·풍속에 일대개혁을 단행하였다. 스웨덴과 북방전쟁을 벌여 잉그리아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등을 손에 넣었다. 1721년 원로원이 그에게 ‘임페라톨’(황제)이라는 칭호를 보내면서 러시아 절대주의왕정이 확립되었다.
표트르 1세 동상

표트르 1세 동상

출생-사망 1672.6.9 ~ 1725.2.8
국적/왕조 러시아 로마노프왕조
재위기간 1682년 ~ 1725년
활동분야 정치

알렉세이의 14째 아들이다. 알렉세이 황제의 후처(後妻) 나타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10세 때에 궁중혁명(宮中革命)으로 크렘린에서 쫓겨나 모스크바 근교 프레오브라젠스코에 마을로 이사하였다. 정규 교육이라고는 거의 받지 못하고 자랐으나,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건강하여, 초인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정력적인 방법으로, 러시아에 주류하던 외국인들로부터 포술(砲術) ·조선술(造船術) 등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배워 익혔다.

1682년 이복형(異腹兄) 이반 5세, 이어서 이복 누나 소피아와 병립(竝立)하여 정무(政務)를 보다가, 소피아가 그에 대한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하자, 1689년 정치의 실권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1695년 돈강(江)의 하구(河口)에 있는 튀르키예의 요새 아조프를 공격하다가 실패하자, 많은 외국인 기사(技師)들을 초빙하는 한편 전국의 장인(匠人)들을 소집하여 함대(艦隊)를 편성하고, 이듬해 다시 튀르키예를 공격하여 아조프를 차지하였다.

1697년에는 튀르키예에 대한 서유럽 기독교국들의 동맹 체결이라는 표면적 이유를 내세워 서유럽에 사절단(使節團)을 파견하면서, 자기 자신도 사절단의 일원으로 변장하여 러시아의 군주로서는 최초로 서유럽 각국을 여행하여 견문을 넓히고, 스스로 직공(職工)이 되어 포술 ·조선술 등을 익혔다. 그의 서유럽 여행은 본국의 총병대(銃兵隊)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급보를 받음으로써 중단되었으나, 귀국 후 즉시 반란을 진압함과 동시에 러시아인의 복장을 비롯하여 수염을 기르는 습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관습 ·풍속에 일대개혁을 단행하였다.

1700년 스웨덴과 북방전쟁이 벌어져 21년이나 싸움이 계속되었으나, 니스타트의 화의(和議)로써 잉그리아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등을 손에 넣어 러시아가 목적한 바를 거의 달성하였다. 1721년 원로원(元老院)은 그에게 ‘임페라톨’(황제)이라는 칭호를 보내고, 또 ‘대제(大帝)’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로써 러시아의 절대주의왕정이 확립되었다.

1703년부터 네바 하구(河口)의 삼각주에 새로운 수도(首都) 상트페테르부르크(표트르의 도시라는 뜻)를 건설하여, 이곳을 ‘유럽에 대한 창구(窓口)’로 사용함과 동시에 발트해(海) 지배를 위한 기지로 삼았다.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으로서 군사 ·행정 ·산업 ·교육 ·종교 등 각 분야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그 대부분이 즉흥적인 착상에서 나온 것이고, 중심 사상이 결여된 것이었기 때문에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세운 14의 ‘관등표(官等表)’는 경찰제도와 함께 제정(帝政)이 몰락할 때까지 존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