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이사금

파사이사금

[ 婆娑尼師今 ]

요약 신라의 제5대 왕 (재위 80∼112).
출생-사망 ? ~ 112
국적/왕조 신라
재위기간 80년 ~ 112년
별칭 파사이질금(婆娑尼叱今)
활동분야 정치

성은 박(朴), 이름은 파사(婆娑)이다. 왕호(王號)는 이사금(尼師今)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파사이질금(婆娑尼叱今)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제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재위 24~57)의 둘째아들이다. 《삼국유사》의 왕력(王曆) 편에는 파사이사금의 어머니가 유리이사금의 왕비인 사요갈문왕(辭要葛文王)의 딸 김씨(金氏)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유리이사금의 왕비에 대해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 박씨(朴氏) 등으로 전하고 있다. 따라서 파사이사금의 생모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는 파사이사금이 유리이사금의 동생인 나로(柰老)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비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인 사성부인(史省夫人) 김씨(金氏)이며, 신라의 제6대 왕인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 재위 112~134) 등의 자식이 있었다. 《삼국유사》에는 왕비가 사초부인(史肖夫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80년(탈해 24)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재위 57∼80)이 죽은 뒤에 신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는 원래 유리이사금의 태자였던 일성(逸聖)을 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파사이사금이 더 위엄이 있고 현명해서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파사이사금이 백성들을 사랑하고 매우 검소하고 절도 있게 생활을 해서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서는 탈해이사금이 김알지(金閼智)를 태자로 책봉했으나, 김알지가 그 자리를 파사이사금에게 물려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신라는 탈해이사금 때인 65년(탈해 9)부터 박씨 왕족들을 주주(州主)와 군주(郡主)로 임명해 주(州)와 군(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있었는데, 파사이사금은 왕위에 오른 뒤에 여러 차례 각지를 순행하며 이들을 감독하였다. 81년(파사 2) 왕위에 오르자마자 주와 군을 순행하며 창고를 풀어 백성을 구제하고 죄수들도 대규모로 사면했다. 그리고 82년(파사 3)에는 각지의 관리들에게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라는 명을 내렸다. 90년(파사 11)에는 10인을 파견해 주주와 군주들을 감독하여 공무를 소홀히 하거나 농토를 황폐하게 한 자가 있으면 징계하게 했다. 93년(파사 14)에는 고소부리군(古所夫里郡)에 직접 행차하여 나이 많은 백성을 위문하고 곡식을 주었다.

그리고 파사이사금은 가야와 백제에 대한 방어체제를 정비하면서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해 신라의 영토를 확대했다. 87년(파사 8) 파사이사금은 각지에 성과 보루를 쌓을 것을 명하고 가소성(加召城)과 마두성(馬頭城)을 쌓았다. 이것은 기록된 것들 가운데 신라가 경주를 벗어난 지역에서 쌓은 최초의 성들이다. 94년(파사 15) 가야(伽倻)가 마두성(馬頭城)을 공격해오자 아찬(阿湌) 길원(吉元)을 보내 물리쳤다. 96년(파사 17)에는 가야의 침공을 막기 위해 파견한 장세(長世)가 전사하자, 파사이사금은 직접 5천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출전해 가야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듬해에는 가야를 치려했으나 가야의 국주(國主)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해 중단했다. 백제도 105년(파사 26)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해왔다. 이 과정에서 신라의 영토는 주변의 소국들을 병합하며 넓혀졌다. 《삼국사기》에는 파사이사금 때에 백제의 나이군(奈已郡,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을 빼앗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02년(파사 23) 음즙벌국(音汁伐國)을 복속시켜 그곳에 음즙화현(音汁火縣, 지금의 경상북도 안강)을 설치했으며, 실직국(悉直國,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강원특별자치도 삼척)과 압독국(押督國,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도 병합했다. 108년(파사 29)에는 군사를 보내 비지국(比只國), 다벌국(多伐國), 초팔국(草八國)을 병합했다. 이 밖에 굴아화촌(屈阿火村, 지금의 울산)을 점령해 그곳에 현을 설치하기도 했다.

파사이사금은 101년(파사 22) 금성(金城) 동남쪽에 월성(月城)을 쌓고 그곳으로 왕궁을 옮겼다. 월성은 재성(在城)이라고도 불렸는데, 그 둘레가 1천23보나 되었다고 한다. 그는 112년(파사 33) 겨울에 사망했으며, 사릉원(蛇陵園)에 매장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인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이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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