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마이사금

지마이사금

[ 祗摩尼師今 ]

요약 신라의 제6대 왕 (재위 112∼134).
경주 지마왕릉

경주 지마왕릉

출생-사망 ? ~ 134
국적/왕조 신라
재위기간 112년∼134년
별칭 지미이사금, 지마이질금
활동분야 정치

성은 박(朴), 이름[諱]는 지마(祗摩/祇磨)이며, 지미(祇味)라고도 한다. 왕호(王號)는 (尼師今)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지마이질금(祇磨尼叱今)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제5대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재위 80∼112)의 적자(嫡子)로 태어났으며, 모친은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인 사성부인(史省夫人) 김씨(金氏)이다. 《삼국유사》에는 사초부인(史肖夫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은 마제갈문왕(摩帝葛文王)의 딸인 애례부인(愛禮夫人) 김씨(金氏)를 왕비로 맞이했고,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재위 154∼184)의 왕비인 내례부인(內禮夫人) 박씨(朴氏)를 낳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마이사금이 아직 태자였을 때 파사이사금과 함께 사냥에 나섰다가 한기부(韓歧部)의 이찬(伊湌) 허루(許婁)가 연 잔치에서 애례부인 김씨를 보고 반하여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 했던 허루가 이들의 결혼에 불만을 갖자, 파사이사금이 이찬 위에 뒷날 각간(角干)으로 불리게 되는 주다(酒多)라는 직위를 새로 만들어 이를 달랬다고 한다.

지마이사금은 112년(파사 33) 겨울에 파사이사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113년(지마 2)에 창영(昌永)을 이찬(伊湌)으로 삼아 국정을 맡겼으며, 옥권(玉權)을 파진찬(波珍湌), 신권(申權)을 일길찬(一吉湌), 순선(順宣)을 급찬(級湌)으로 삼았다.

지마이사금의 재위 기간에 신라는 파사이사금 때와 마찬가지로 백제(百濟)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가야(伽倻)와는 영토를 놓고 자주 대립했다. 백제는 지마이사금이 왕위에 오르자 113년(지마 2)에 사신을 보내왔으나, 가야는 115년(지마 4) 신라의 남쪽 변경을 침공해왔다. 그러자 지마이사금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야를 공격했으나, 황산하(黃山河)에서 매복하고 있던 가야군에 포위되어 패퇴하였다. 이듬해 가을에 왕은 다시 1만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다시 가야 공격에 나섰으나 큰 비를 만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121년(지마 10)에 지마이사금은 익종(翌宗)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흔련(昕連)을 파진찬, 임권(林權)을 아찬으로 임명했으며, 대증산성(大甑山城)을 쌓았다. 하지만 이 해에 왜인(倭人)이 동쪽 변경을 쳐들어왔다. 왜인들의 침공은 이듬해까지 이어져 금성 사람들이 다투어 산골짜기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왕은 이찬 익종을 왜인들에게 보내 교섭을 하여 그들이 침공을 멈추게 했으며, 123년(지마 12)에는 왜국과 강화(講和)를 하였다.

125년(지마 14) 봄에는 북쪽에서 말갈(靺鞨)이 쳐들어와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을 자행했다. 말갈은 그해 가을에 다시 대령(大嶺)의 책성(柵城)을 기습하고 국경인 니하(泥河)를 건너 신라의 영토를 침공해왔다. 지마이사금은 백제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고, 백제가 다섯 장수가 이끄는 군대를 보내 신라를 돕게 하자 말갈은 퇴각하였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지마이사금 때에 신라가 안강(安康)의 음질국(音質國)과 경산(慶山)이나 양산(梁山) 일대로 추정되는 압량국(押梁國)을 멸망시키고 영토를 넓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이것이 파사이사금 때의 일로 전해지고 있다.

지마이사금은 23년 동안 신라를 다스리다가 134년(지마 23) 가을에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왕위를 물려받을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부(伯父)인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재위 134~154)이 왕위를 이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일성이사금이 지마이사금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마이사금 본문 이미지 1애례부인파사이사금지마이사금아달라이사금일성이사금유리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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