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

흉노

[ 匈奴 ]

요약 BC 3세기 말부터 AD 1세기 말까지 몽골고원·만리장성 지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기마민족(遊牧騎馬民族) 및 그들이 형성한 북몽고와 중앙아시아 일대의 국가를 일컫는 말.

주대(周代)에 중국의 북변을 위협하였던 험윤(玁狁)·훈육(獯鬻) 등의 후예라고 하지만 확증은 없다.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중국을 통일하였을 무렵(BC 221) 흉노 연제(攣鞮:虛連題) 씨족의 족장(族長) 두만(頭曼)은 몽골고원의 제족연합(諸族聯合)에 일단성공하였으나, 그 아들 묵돌[冒頓:?∼BC 174]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스스로 선우[單于:북아시아의 유목국가의 군주를 가한(可汗)이라고 칭하기 이전에 사용한 칭호]라 칭하였다.

묵돌은 남만주의 동호(東湖), 북방의 정령(丁令), 예니세이강(江) 상류의 키르기스를 정복하고, 서방의 월지[月氏]를 격파하여, 북아시아 최초의 유목국가를 세우고, 이어 산시성[山西省] 북부에 침입하였다.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은 북진하여 이를 요격(邀擊)하였으나, 다퉁[大同] 부근에서 포위되어 간신히 탈출한 다음, 한황실(漢皇室)의 딸을 선우에게 주어 처를 삼게 하고, 매년 많은 견직물 ·술 ·쌀 등을 흉노에게 보낼 것을 조건으로 화의(和議)를 맺었다(BC 198). 그 뒤 흉노는 오손(烏孫)이나 동(東)투르키스탄의 오아시스 제국(諸國)을 지배하였는데, 그 결과 흉노의 지배권은 동(東)은 러허[熱河]에서부터 서는 동(東)투르키스탄까지, 북은 예니세이강(江) 상류에서부터 남은 오르도스까지에 이르게 되었다.

흉노의 주요한 경제적 기지는 동(東)투르키스탄에 있었고, 군수기지는 내(內)몽골 ·오르도스에 있었으며, 전자(前者)로부터는 그 물산(物産)과 교통 ·통상보호세(保護稅)를 거두었고, 후자에서는 스키트 ·시베리아계(系)의 청동기, 특히 무기류(이른바 綏遠 또는 오르도스 靑銅器)를 제작하였다. 이리하여 흉노는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한나라 무제(武帝:재위 BC 141∼BC 87)는 자주 흉노에게 원정군을 보냄과 동시에 이를 동서로부터 협격(狹擊)하고자 장건(張騫)을 월지에 파견하였다(BC 139∼BC 126). 이와 같은 무제의 정책으로 흉노는 외(外)몽골로 도피하고, 동투르키스탄은 한나라의 세력하에 들어갔으며, 또 정령 ·선비(鮮卑) 등의 예속제족(隸屬諸族)이 독립하였다.

더욱이 흉노는 내분이 일어 5명의 선우가 난립하였고, 이어서 질지선우(郅支單于:西匈奴)와 그 아우인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東匈奴)가 대립하기에 이르렀다(BC 54). 호한야는 한나라에 항복, 그 원조하에 들었으므로 질지선우는 한나라와 호한야의 연합이 두려워 서쪽 키르기스 초원으로 옮겼으나, 한나라의 원정군에게 패하여 살해되었다(BC 36). 그 뒤 흉노는 호한야를 중심으로 다시 부흥, 한나라와의 관계도 호한야가 왕소군(王昭君:한나라 元帝의 後宮)을 아내로 맞이하는 등 일시 소강상태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재차 내분이 일어나고, 제2대 호한야선우가 후한(後漢)에 투항함으로써 호한야가 이끄는 남(南)흉노와 북(北)흉노로 분열하였다(48). 남흉노는 간쑤[甘肅] ·산시[陝西] ·산시[山西] 등에 나뉘어 살며, 중국 북변 ·서북변의 방위를 담당하였으나, 서진(西晉)에서 내분이 일어난 것을 틈타 반란을 일으켜 5호16국 중, 한(漢:前趙) ·북량(北凉) ·하(夏)를 세워, 점차 중국화(中國化)하기 시작하였다. 북흉노는 때로 중국에 침입하기도 하였으나, 선비의 공격을 받아 선우가 살해되고, 후한 ·남흉노 연합군이 그 본거지를 공격하게 되자 대패하였고(91), 그 결과 몽골고원에서 흉노가 세운 국가는 와해되었다.

남은 세력들은 선비, 또는 유연(柔然) 등의 국가에 복속하였다.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하여 진(秦) ·한을 위협했던 흉노의 자손이 바로 유럽의 민족 대이동을 불러일으키는 인연이 된 훈족이라는 설이 있다. 이 문제는 처음으로 학계에 제출된 지 2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흉노의 서방 이동이 훈족의 서방 이동과 연관되며, 훈족의 명칭이 흉노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흉노의 인종에 관해서는 투르크계(系) ·몽골계(系) ·아리아계(系) 등의 설이 있는데, 특히 투르크계설(系說)이 유력하다. 최근 흉노는 예니세이강 유역에 모여 살던 고대민족과 인종적 관련이 있다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이것도 확실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국가형태는 연제 ·호연(呼衍) ·수복(須卜) ·난(蘭) ·구림(丘林) 등의 씨족으로 이루어진 흉노 부족을 지배층으로 하는 부족 연합체였으며, 선우의 지위는 연제씨족에게 세습되었고, 알씨(閼氏)라고 불린 황후는 원칙적으로 여타의 4씨족에서 나왔다. 국가를 구성하는 여러 부족의 족장은 1년에 세 번, 선우의 본거지에 모여 무속적(巫俗的)인 제사를 거행하였고, 동시에 국사를 의론하였다.

유목과 수렵생활로 양 ·말 등의 가축을 방목하고, 하영지(夏營地)와 동영지(冬營地) 사이를 이동하며 천막식 원형(圓形)가옥에 거주하였다. 예니세이강 상류의 미누신스크 분지에서 발굴된 한식(漢式) 궁전은 흉노에게 항복한 한나라 장군 이릉(李陵)의 것이라고 한다. 또한, P.K.코즐로프 일행이 노인울라(Noinula)에서 발굴한 귀족분묘는 기원 전후의 것인 듯한데 그 곳에서 스키트-시베리아계의 문물뿐만 아니라, 견직물 ·칠기 ·옥기 등의 중국제품, 이란계의 동식물 무늬와 인물상을 수놓은 모직물 등이 출토되어 흉노의 지배층에 대한 중국 ·서방문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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