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 독트린

트루먼 독트린

[ Truman Doctrine ]

요약 1947년 3월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의회에서 선언한 외교정책 원칙.
트루먼

트루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제국주의전체주의가 주도하던 세계 질서가 몰락하였다. 그리고 전후(戰後)의 세계 질서는 미국소련이 주도하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독일·이탈리아·일본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에 대항하여 승리를 쟁취하였으나, 전후 처리 문제에서 갈등을 빚었다. 특히 폴란드를 필두로 한 동유럽 국가의 정부 수립 문제를 두고 미국은 자유 선거를 주장한 반면, 소련은 미국과 서유럽의 공세를 막기 위한 완충 지대로써 여러 동유럽 국가에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한 것이 대표적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에 이어 새롭게 미국의 대통령이 된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은 소련의 팽창에 대하여 얄타 회담의 합의를 준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전후 세계 질서의 변화는 1946년 2월 22일 미국의 주소미국대사대리 조지 케넌(George Frost Kennan)이 작성한 ‘긴 전보(The Long Telegram)’와 1946년 3월 5일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미국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대학에서 ‘철의 장막(Iron Curtain)’을 연설한 것에서도 감지된다. 조지 케넌은 ‘긴 전보’를 통해 미국이 소련의 팽창에 대처하기 위하여 비소련권 국가를 지원하여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1947년 7월에 논문을 투고하여 "미국의 대소정책은 장기적이고, 인내심 있으면서 단호하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봉쇄정책이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조지 케넌의 ‘긴 전보’는 향후 미국의 소련봉쇄정책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던 중 1947년 2월 21일 영국이 공산주의의 공세에 직면한 그리스튀르키예에 대한 재정 지원을 6주 후에 종료하며, 이후의 재정 지원은 미국이 맡아줄 것을 요청하는 외교 문서를 발송하였다. 이 문서를 접수한 미국은 영국이 그리스와 튀르키예에서 철수한다면 그 빈 자리는 소련이 차지할 것이고, 소련은 더 나아가 프랑스까지 공산화할 것이라 보았다. 이에 미국은 그리스와 튀르키예에 대한 긴급지원계획을 수립하였는데, 그 내용은 1947년 3월 12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상·하양원합동회의 연설에서 알려졌다. 이를 트루먼독트린(Truman Doctrine)이라고 한다. 트루먼은 "미국이 무장한 소수의 세력 혹은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저항하는 모든 자유민을 도와야 함"을 주장하며, 의회에 그리스와 튀르키예를 지원하기 위한 4억 달러의 예산을 요구하였다. 의회는 트루먼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미국은 그리스와 튀르키예를 지원하여 이들 지역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와 같은 트루먼독트린은 소련의 팽창에 대한 미국의 소련봉쇄정책의 출발점이자 냉전(Cold War, 冷戰)의 시작으로 이해된다.

트루먼독트린의 발표 이후 미국의 소련봉쇄정책은 1947년 6월 5일 하버드 대학에서 유럽부흥계획이 담긴 마셜플랜(Marshall Plan)으로, 19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로 구체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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