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

태평천국

[ 太平天國 ]

요약 청(淸)나라 말기 홍수전(洪秀全)과 농민반란군이 세워 14년간 존속한 국가(1851∼1864).

목차

  1. 경과
  2. 의의

청나라에서는 장발적(長髮賊)·월비(粤匪)·발역(髮逆) 등으로 불렀다. 1843년 홍수전광둥성[廣東省] 화현[花縣]에서 창시한 배상제회(拜上帝會)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하늘의 주재자인 상제(上帝)를 그리스도교의 여호와와 같은 위치에 놓고, 모세·그리스도가 여호와로부터 구세의 사명을 받았듯이 온갖 악마의 유혹으로 타락의 극에 달한 중국을 구제하라는 명령을 상제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모세의 10계를 본떠서 제정한 금욕적인 계율을 지키고 유일신인 상제만을 신앙하면 질병이나 재해에서 벗어나고 나날의 의식(衣食)이 보장된다고 역설하였다.

정통적인 요소를 짙게 풍기면서도 엄격한 우상부정(偶像否定), 유교공자에 대한 비판, 유일신 신앙 등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것이었다. 상제회(上帝會)는 주로 계속된 기근과 비적의 약탈, 지주·고리대금업자 등의 압박에 시달리던 광시성[廣西省]의 산촌 농민과 일부 소지주·광부·실업자층으로 그 조직을 넓혀나갔다.

상제회의 우상파괴운동과 신도의 단결로 인하여 전통적인 촌락의 질서가 파괴될 위험성이 있다고 본 향신(鄕紳)과 관헌의 박해가 이들에게 가해지고 이에 대항하는 무장투쟁이 빈발하자 홍수전은 광시성 구이핑현[桂平縣] 진톈[金田]에 신도들을 결집시켜 1851년 초 남녀노소 약 1만 명을 거느리고 봉기하여 ‘태평천국’이라고 내세웠다. 이 ‘태평천국’이라는 호(號)는 상제의 명령과 가호를 받아 평화롭고 평등한 지상천국을 수립한다는 기원(祈願)을 표시하는 것이다.

경과

태평천국 수립 후 이들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이를 토벌하려는 정부군 역시 대규모로 증가하게 되었다. 태평천국군은 이를 피해 본거지를 떠나 한동안 광시성과 광둥성의 경계지역을 오가며 전투를 벌였다. 태평천국군은 1851년 9월 푸젠성[福建省]의 융안현[永安縣]을 차지하고 그곳에 머물며 세력을 키우게 되었다. 1852년 4월 다시 진격을 시작하여 광시성의 성도(省都)인 구이린[桂林], 북쪽에 위치한 후난성[湖南省]의 창사[長沙]를 차례로 공략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그러던 중 1852년 12월 후난성 웨저우[岳州]를 점령하였는데, 이때 태평군은 각지의 빈농·유민·수공업노동자와 천지회원(天地會員)을 흡수하여 급속히 확대되었다.

태평천국군은 곧바로 후베이성 [湖北省] 한커우[漢口], 1853년 1월 후베이의 성도이자 요충지인 우창[武昌], 같은 해 2월에 안칭[安慶]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수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마침내 난징[南京]을 점령하고  이를 태평천국의 수도로 정하였다. 곧이어 홍수전은 난징을 '톈징[天京]'이라 개칭하고 본격적인 신국가 건설에 착수하였다.

태평천국 본문 이미지 1

이와 같이 급속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청왕조와 그 군대의 부패와 무능에도 연유하지만 또한 태평군의 엄격한 군기와 도시의 관료·지주·부상(富商)에 공격을 집중하여 민중에게 그 전리품을 분배하고, 조세나 지대를 면제한다는 구호를 내건 점, 그리고 멸만흥한(滅滿興漢)의 강력한 주장 등에 대하여 민중이 지지와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점에도 있었다.

태평천국 정부는 그들의 이상향을 ‘천조전무제도(天朝田畝制度)’로서 구체화하여 발표하였다. 그것은 중국의 전통적이고 특수한 평등사상으로서의 ‘대동(大同)’의 이념에 입각하여 토지를 공유로 하고 남녀 균등히 할당하며 전체 잉여물자를 공유로 하여 노유고과(老幼孤寡)를 부양하는 등 차별과 대립이 없는 세계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며, 거병 이후 군대 내에서 실행해 왔던 것을 사회 일반에게 적용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를 실행에 옮긴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일반에게 종래의 토지사유제도가 그대로 시행되었다.

지주나 부상에 대한 가혹한 공격, 그것을 계기로 한 농민의 모반이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의식적으로 토지혁명으로까지 몰고가는 노력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지방정권(鄕官)도 대개는 기존질서를 지키기 위하여 태평천국에 ‘귀순’한 지주적 세력에게 점거되었다.

난징의 중앙정부도 점차 왕조적인 체제에 의하여 스스로 권위를 세우는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개인적 권력을 둘러싼 내부 대립이 시작되었다. 1856년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淸)과 천왕(天王)이라 칭한 홍수전과의 대립, 동왕에 대한 북왕 위창휘(韋昌輝)의 쿠데타[楊韋內訌], 익왕(翼王) 석달개(石達開)의 독립행동 등은 그 비극적 조짐이며 태평천국의 치명상이 되었다.

이 분열에 의한 약체화를 틈타서 증국번(曾國藩) 등이 조직한 반혁명 의용군[湘軍] 등은 점차 반격으로 나와서, 특히 1860년 베이징조약 체결 후 중립정책으로부터 반(反)태평 무력간섭정책으로 바뀐 영국 등 열강의 군사원조, 특히 골든 등의 상승군과 협력함으로써 태평천국을 압살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시작되었다.

의의

태평천국이 일으킨 농민의 광범위한 투쟁은 근대 중국에 있어서 농민혁명의 출발점이 되었다. 또 그 한(漢)민족주의는 쑨원[孫文] 등 동맹회의 혁명운동으로 이어졌다. 또 태평천국이 수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특히 그 말기에 보여준 대외저항은 영국 등 열강에게 강한 인상을 주어, 중국의 완전 식민지화를 저지하는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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