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 Ernst Ludwig Kirchner ]

요약 20세기 독일의 화가이자 판화가. 독일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최초의 표현주의 그룹인 '브뤼케(Die Brucke:다리)'를 창설했고, 잡지 『폭풍우 Der Strum』 및 청기사파에 참가했다. 강렬한 회화적 분출을 추구한 그는 왜곡된 형태와 색채의 부조화를 통해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과 창작에의 열망을 표현했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작품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작품

출생-사망 1880.5.6 ~ 1938.6.15
국적 독일
활동분야 회화, 판화
출생지 독일 바이에른주(州) 아샤펜베르크
주요저서 『브뤼케파의 연감』(1913), 『다보스의 일기』(1925)
주요작품 《마르첼라 Marzella》(1909~1910), 《거리의 다섯 여인들 Five Women on the Street》(1913), 《베를린의 거리 풍경 Berlin Street Scene》(1913), 《군인 차림의 자화상 Self-Portrait as a Soldier》(1915), 《할레의 붉은 탑 The Red Tower in Halle》(1915)
주요업적 최초의 표현주의 그룹인 '브뤼케(다리)' 창설

1880년 독일 바이에른주(州) 아샤펜베르크에서 태어났다. 1901년 드레스덴의 왕립공과대학에 입학해 건축학을 공부하면서 틈틈이 뮌헨의 미술학교에서 유겐트슈틸 운동의 중심인물인 헤르만 오브리스트(Hermann Obrist)에게 회화를 배웠다. 그리고 프리츠 브라이엘(Fritz Bleyl), 에리히 헤켈(Erich Heckel), 카를 슈미트 로틀루프(Karl Schmidt-Rottluff) 등 몇몇 친구들과 회화와 소묘 모임을 조직했다. 그는 1905년 이 모임의 이름을 ‘브뤼케(Die Brücke:다리)’라 칭하고 전업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키르히너는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 같은 독일 르네상스 화가들의 회화와 판화에 관심이 많았고,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그리고 프랑스 야수파 화가들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또한 아프리카오세아니아의 원시 미술에 매료되어 매우 거칠고 원색적인 화면을 만들어냈다. 특히 미술을 내적 갈등의 즉각적이고 폭력적인 시각 표현으로 보고 강렬한 회화적 분출을 추구했다. 이러한 경향은 훗날 독일 표현주의로 알려지게 될 사조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1906년 드레스덴에서 푸줏간 자리에 공동 작업실을 얻은 브뤼케파 화가들은 함께 작업하며 첫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이 시기 브뤼케파가 선호한 장르는 다름 아닌 누드화였다. 이를 통해 화가들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하고 제약 없는 삶에 접근하고자 했다. 키르히너 역시 동료들과 모리츠부르크 호와 발트 해의 페마른 호에서 함께 일하며 자연에 완전히 동화된 나체의 인물을 그렸다.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이 묻어나는 그의 누드화는 당시 반문명 혹은 반근대화의 일환으로 유럽을 휩쓴 나체주의의 영향 속에 문명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벌거벗은 군상을 통해 보여주었다.

1911년 키르히너와 브뤼케파 화가들은 막스 페히슈타인(Max Pechstein)을 따라 베를린으로 갔다. 베를린으로 옮겨온 후 그는 새로운 거대도시에 주목했다. 이전에 그가 자연에서 맛보았던 것이 생명과 해방이라면 이제 그는 문명의 도시에서 불안과 긴장, 그리고 피할 수 없는 타락의 기운을 느꼈다. 키르히너는 베를린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소재로 광폭하고 혼란스러운 도시의 정경을 화폭에 담아냈다. 날카롭고 뾰족한 선과 과장된 원근법으로 도시의 빠른 속도감을 표현했고, 부조화된 색감과 각진 윤곽선으로 도시인의 신경과민과 절망을 표현했다.

브뤼케파는 1912년 뮌헨의 ‘청기사파’들이 베를린에서 개최한 두 번째 전시회에 참가하며 여전히 표현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1913년 키르히너와 다른 회원들 간의 갈등이 원인이 되어 브뤼케파가 해체되었다. 키르히너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대에 자원입대했으나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고 이듬해 신경쇠약으로 임시 제대했다. 1917년 전쟁을 피해 스위스 다보스 근처 프라우엔키르슈로 이주한 그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그의 양식도 한결 차분해지고 단순화되어 알프스 산의 풍경과 소박한 농부의 모습, 그리고 친구들의 초상화를 선보였다.

1933년 전쟁에서 받은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날 무렵 당시 정권을 잡은 나치는 키르히너를 ‘퇴폐 미술가’로 규정했다. 1937년 나치 정권이 뮌헨에서 선전용으로 마련한 ‘퇴폐 미술전’에 키르히너가 포함되자, 키르히너의 불안감은 증폭되었다. 나치는 그의 작품의 전시 및 거래를 금지하고 600점이 넘는 그의 작품들을 미술관에서 철거시켰으며, 이로 인해 많은 작품이 파괴되었다. 절망에 빠진 키르히너는 깊은 우울증으로 58세가 되던 1938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주요 작품에는 《일본 우산을 쓴 소녀 Girl under a Japanese Umbrella》(1909), 《마르첼라 Marzella》(1909~1910), 《모델과 함께 있는 자화상 Self-Portrait with Model》(1910), 《거리의 다섯 여인들 Five Women on the Street》(1913), 《베를린의 거리 풍경 Berlin Street Scene》(1913), 《군인 차림의 자화상 Self-Portrait as a Soldier》(1915), 《할레의 붉은 탑 The Red Tower in Halle》(191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