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옷

중국옷

[ 中國옷 ]

요약 중국의 전통적인 민족의상.

17~20세기에 청왕조(淸王朝)로서 군림한 만주 민족의 고유한 복장에 약간의 한민족적 요소가 가미되어 성립된 옷을 가리킨다.

중국 의복은 3000년 전의 은대(殷代)의 갑골문자(甲骨文字)에 의(衣)자와 구(裘:모피옷)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는 이 2가지 옷을 입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사(絲)자도 있으므로 직물로 의복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으며, 실의 재료는 상(桑)자가 있으므로 견(絹)을 사용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의복의 색채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현재 남아 있는 은대의 유물에서 붉은색과 검정색을 볼 수 있다.

주대(周代) 중기(BC 5세기)에 공자가 편찬했다는 《시경(詩經)》의 <국풍편(國風篇)>은 당시 각국에서 부르던 민요를 수집한 것인데, 이를 비롯한 《논어(論語)》 등 여러 책에는 의복에 관한 자료가 있다. 주대의 의복은 상부를 의(衣), 하부를 상(裳)이라 하였으며, 상하를 2개로 나누어 지어 띠를 매어 착용하였다. 의는 좌우의 깃을 여미는 한복저고리와 비슷하다. 상의 속에는 중의(中衣)를 입고, 중의의 깃은 붉은색으로 염색하거나 자수로 장식한 것을 달았다는 기록이 《시경》에 보인다. 또 의복의 색채는 흰색과 검정 계통을 주로 썼고, 다음으로 노랑 ·파랑 ·감색 ·녹색 ·자색 ·홍색 등의 색채를 사용하였다. 《시경》에 녹의황상(綠衣黃裳)이란 시구가 있는 것처럼 상의와 하상의 빛깔을 달리함으로써 색채의 효과를 나타내었다.

예기(禮記)》의 <옥조편(玉藻篇)>에 “의는 정색(正色), 상은 간색(間色)”이라고 한 것을 보면 상에 많은 색채를 사용한 듯하다. 의복의 문양은 그림 회(繪) 자가 실 사변(糸)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색실로 수를 짜 넣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문양은 은 ·주석 ·구리 그릇에 새긴 문양인 전문(電文:四角回線文의 연속) ·수면문(獸面文:邪惡을 물리치는 鬼面) ·파문(巴文:火焰을 표현한 文) ·용문(龍文) ·봉문(鳳文) ·삼각문 ·원문(圓文)을 도안한 것을 사용했으리라고 상상되나 염직품(染織品)의 유존품이 없으므로 확실한 것은 말할 수 없다.

의와 상으로 나뉜 의복은 남자도 함께 사용하였다는 것을 《시경》에 “동쪽이 아직 밝지 않아 의상을 전도(顚倒)한다”라는 글귀로 새벽잠에 놀란 남자의 당황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또 심의(深衣)라는, 상하가 하나로 된 품이 넉넉한 옷이 있는데, 이것도 나비가 넓은 띠로 허리 부분에서 앞으로 매었으며 앞에 길게 늘어진 여분의 천을 신(紳)이라 했다. 이것은 예식용 복장으로 입었으며, 길이는 땅에 끌리지 않을 정도로 길고 소매는 손이 숨겨질 정도이며, 소맷부리도 20cm 정도였다.

의복에는 홑옷과 겹옷이 있다. 《시경》에 ‘녹의황리(綠衣黃裏)’라는 어구가 있는데, 이것은 겹옷을 가리키는 말이다. 겨울철 의복에는 귀족은 새끼양의 모피, 빈자는 성양(成羊)의 모피를 썼는데, 털을 바깥쪽으로 하여 착용했다. 여우나 성성이 ·표범 등의 가죽도 이용했다. 여름에는 칡 ·마(麻) 등의 섬유로 짠 천을 사용하였다. 이 밖에 고(袴:바지)도 하의로 사용되었는데, 일반인은 이것에 짧은 상의를 입고 일을 하였다.

한대(漢代)에는 전국이 통일됨으로써 생산이 향상되고 견직물이 다량으로 생산되어 국외로 수출까지 하였다. 직물 종류도 나사(羅紗:얇은 견직물) ·능직 ·금직(錦織:가는 날실에 굵은 씨실을 사용하여 문양을 나타낸다) ·자수 등 다양했으며, 색채도 풍부하여 호화로운 직물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그리고 소매의 길이나 나비도 넓어지고 옷자락도 길어져 옷감을 풍부하게 사용하고 노동하지 않는 생활을 자랑으로 여기는 양상이 후세에 영향을 끼쳐, 한복 도포의 넓은 소매나 승려의 승복에 그 흔적이 있다.

또 한대의 무의(舞衣)의 소매 등은 땅에 닿을 정도로 길었으며 그것을 좌우로 흔들어 곡선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는데, 그 양식은 중국의 경희(京戱)에 남아 있다. 또 목에 두르는 피건(被巾:목도리)이란 긴 견포(絹布)도 장식용으로 사용되었다. 중국의 문화는 서양의 영향으로 때때로 양상이 달라지기도 하나 복장은 화이사상(華夷思想) 때문에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주말(周末) ·전국시대에서 한대에 걸쳐 대구(帶鉤)라는 호화로운 요대(腰帶)의 장식쇠가 유행하였고, 그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원래 서방민족의 혁대에 사용하는 장식쇠로서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갸름한 장식쇠의 수부(首部)가 굴곡되어 혁대 끝의 고리에 거는 양식, 다른 하나는 현대의 밴드와 같이 수부에 혁대의 구멍을 뚫는 설침(舌針)이 있는 양식인데, 한대의 유품에는 전자가 많다. 또 한대의 벽화 ·화상석(畵像石) 등의 유품에서 볼 수 있는 복장 가운데는, 전사(戰士)나 농민은 바지를 입은 모습이 많다.

바지는 경의(脛衣)라고도 하며, 노동하기에 편리하므로 중국에서도 하류층에서 많이 사용하였는데, 서북의 타민족은 마상(馬上)생활을 하므로 원래부터 바지차림이었다. 이러한 서북민족의 호복(胡服)이 중국에도 영향을 끼쳐,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이르러 북조(北朝)의 호민족 출신의 왕조의 정장이 되었고, 한민족의 남조(南朝)에도 영향을 끼쳐 무인이 착용하였다. 이 바지를 무릎 부분에서 끈으로 묶은 모습을 북위대(北魏代)의 화상이나 무인용(武人俑)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남조 초의 동진(東晉)의 고개지(顧愷之)가 그린 《여사잠도(女史箴圖)》에는 앉아 있는 부인이 그려져 있는데, 이 시대까지는 아직 한국과 같이 실내에서 앉는(坐式) 생활을 하였던 것 같다. 호상생활(胡牀生活)로 개량된 것은 북방왕조가 중국 내부에 성립되고 난 후부터이다. 따라서 의복도 그에 맞게 개혁되어 고대의 복장은 다만 왕조의 의식용으로 잔존하게 되었다.

수 ·당대(隋唐代:7~9세기)는 한민족(漢民族)의 왕조로서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에 도읍하였으나, 이 지역은 북방민족인 북위왕조 등에 의해 오랫동안 지배되었으므로 의장(衣裝)도 영향을 받아 원령(圓領, 盤領:둥근 깃)에 단추로 잠그는 장의(長衣)를 입었다. 그 두드러진 것은 황제 ·관리의 포(袍)라는 표의(表衣:겉옷)로서, 밑에는 좌우의 깃을 여미는 종래의 의와 고(바지)를 입고 그 위에 겉옷으로서 원령과 넓은 소매가 달린 포를 입었다. 황후 ·귀부인은 좌우로 여미는 넓은 깃과 넓은 소매가 달린 의를 입고 깃과 소맷부리와 옷자락을 자수로 장식했다.

염직도 쓰촨성[四川省]에서 촉강금(蜀江錦) 등이 발달하여 각지의 명산이 장안으로 모여들었고, 따라서 황제의 예식용 포에는 용무늬를 수놓았다. 색채도 황제는 노랑을 쓰고, 관위(官位)에 따라 주색(朱色) ·녹색의 포를 입었으며, 여성도 포를 입을 때가 있었다. 당대는 서역과 교통이 빈번하던 때였으므로 호복이 유행하여 특히 장안 ·낙양의 청년남녀는 접은 깃이나 둥근 깃의 호복을 입고 기마(騎馬)를 즐겼다.

관위에 따라 의장의 색채나 직물의 종류를 정하는 일은 이 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나, 일반민중의 의복의 빛깔까지 엄중하게 제정한 것은 송대(宋代:10∼13세기)이며,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의장도 업적에 따라 달랐음이 송인(宋人)의 저서인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의 민속항에 나와 있다.

송대는 북방을 요민족(遼民族:내몽골) ·금민족(金民族:만주)에게 점령당한 관계로 특히 보수적이었다. 남송대(南宋代)는 서울이 강남(江南)에 있었기 때문에 염직이 특히 발달하여 자수 ·철금(綴錦) 등에 호화로운 것이 있었다. 그리고 중국 전래의 의관(衣冠)이 존중되었는데, 이 시대의 유교의 영향으로 그 복제(服制)는 오히려 한국에 많이 남아 있다. 또 허베이[華北]의 요 ·금 ·원대는 왕조가 모두 사막 ·초원지대 출신이므로 호복을 착용하였으나, 제왕과 귀족은 중국을 지배하기 위하여 중국식 의복도 병용하였다.

명대(明代)는 한민족의 왕조였으므로 의복은 옛날로 돌아가 정복(正服)을 포의(袍衣)로 하였으며, 용무늬를 많이 사용하고 일반 의류에도 모란[牡丹], 기타 꽃잎무늬를 사용하고 색채도 다양해졌다.

여성은 상의와 하상을 입었는데, 상은 당나라 때부터 군(裙)이라 부른 옷으로 주름을 잡은 약간 긴 스커트형이었다. 청대(淸代)는 만주 출신의 왕조였으므로 호복계의 장통수(長筒袖)의 의복을 입었는데, 둥근 깃이 달리고 오른쪽 겨드랑이부터 아래를 특수한 끈단추로 잠근다. 이것을 치파오[旗袍]라고 하며, 만주인은 모두 팔기(八旗)의 군단(軍團)에 편입되기 때문에 이 이름이 생겼다.

청조는 한인의 반항을 막기 위하여 두발이나 의복을 엄중히 만주식으로 단속했기 때문에 근대 200여 년 간은 전적으로 치파오를 입었으며, 민국혁명(民國革命) 이래 잠시 이 의복이 착용되었으나 현재는 젊은 여성이 취미로 화려한 치파오를 입는 것 외에는 유럽풍의 복장이 보급되어 한국과 마찬가지로 착용범위가 축소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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