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온

정온

[ 鄭蘊 ]

요약 조선 중기 문신. 남명 조식의 학맥을 이었으며 절개와 충절이 높은 선비로 평가된다.
거창 동계종택

거창 동계종택

출생-사망 1569 ~ 1641
본관 초계(草溪)
휘원(輝遠)
동계(桐溪) ·고고자(鼓鼓子)
시호 문간(文簡)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동계문집(桐溪文集)》

1569년(선조2년) 경남 거창군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진사 정유명(鄭惟明)이었으며 어려서 부친에게 글공부를 익혔다. 남명 조식의 학맥을 이었고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진사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說書)·사서·정언 등을 역임하였고, 1614년 부사직(副司直)으로 재임하던 중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죽음이 부당함을 상소하였고, 가해자인 강화부사 정항(鄭沆)의 참수(斬首)를 주장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 대정(大靜)에서 10년간 위리안치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 동안 《덕변록(德辨錄)》과 《망북두시(望北斗詩)》 《망백운가(望白雲歌)》를 지어 애군우국(愛君憂國)의 뜻을 토로하였고 자신을 고고자(鼓鼓子)로 불렀다.

그는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제주 사람들에게 글공부를 가르치는 일에도 노력하였다. 이때문에 제주에서는 정온을 제주오현 중 한사람으로 추앙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석방되어 헌납에 등용되었다. 이어 사간·이조참의·대사간·경상도관찰사·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이조참판으로서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결국 청나라에 굴복하는 화의가 이루어지자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르며 자결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경남 거창군 북상면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다가 5년 만에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제주의 귤림(橘林)서원, 함양(咸陽)의 남계(藍溪)서원에 제향되었다. 그가 마지막까지 은거했던 곳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 모리재(某里齋)가 있다. 문집에 《동계문집(桐溪文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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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동계종택 출처: doop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