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자연

[ nature , 自然 ]

요약 나와서, 자라고, 쇠약해져, 사멸하며 그 안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성, 발전하는 것.

그리스에서는 자연을 피시스(physis)라 하였다. 이 말은 피오마이(태어나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하며, 본래 '생성(生成)'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따르면 자연이란 '그 자체 안에 운동의 원리를 가진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의 자연관에서는, 자연은 조금도 인간에게 대립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러한 생명적 자연의 일부로서 그것에 포괄되어 있다. 자연은 인간에게 대하여 이질적·대립적이 아니고 그것과 동질적으로 조화하고 신(神)마저도 거기에서는 자연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내재적이다.

실제로 탈레스의 말처럼 "만물은 신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여기서 자연을 인식한다는 것은, 근대에서처럼 우리들과 상관없는 이 자연에 밖으로부터 실험(實驗)이라는 '고문(拷問)'을 가하여 자백시켜 이것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에게 친밀한 동질자로서 이것을 안으로부터 직관하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결국 그리스에서는 자연은 인간이나 신(神)까지도 포괄하고 살아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며 이러한 일종의 '범자연주의(汎自然主義)'가 밑바탕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중세 그리스도교 세계에 들어서면, 이 그리스의 범자연주의는 분쇄되어,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과의 분명한 계층적·이절적 질서가 나타난다. 거기에서는 자연도 인간도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며 하느님은 완전히 초월해 있다. 인간도 이제는 자연의 일부가 아니고, 자연은 인간과는 독립적으로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으로서 인간의 관여를 받지 않는 '다른 것'이 된다. 여기에서 자연을 인간과 완전히 독립, 관계가 없는 것으로서 객관화하여, 이것에 밖에서 실험적 조작을 가하여 과학적으로 파악하려는 근대의 실증주의적 태도의 원천을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관찰하게 되면 자연관에 대해서 고대와 중세를 연결시켜 이것을 근대에 대립시키는 것과 같은 지난날의 사고방식보다 오히려 중세와 근대를 연결시켜 이것을 고대의 자연관과 대립시키는 것이 훨씬 합당하다고 생각된다. 즉 중세에서의 자연은 하느님이 인간에 대하여 제삼자로서 정립(定立)시켰다.

이리하여 자연은 인간과 동질의 것이 아니고 조금도 인간의 유추를 허용하지 않는 그 자신의 존재, 타자(他者)가 되었다. 자연의 이 '비인간화'가 추진되었을 때, 그것은 마침내 자연으로부터 모든 인간적 요소, 빛깔이라든가 냄새라든가 하는 '제2성질'이나 '목적의식' 등을 추방하고 오로지 이를 크기·형태·운동 등의 자연 자체의 요소를 인과적(因果的)으로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에 이른다. 이것이 근대의 '기계론적 자연관'이다. 이에 이르는 사상적 계기가 중세에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고는 하나, 그 철저한 자각은 근세철학의 시조 R.데카르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명적·심적(心的)인 요소인 '아니마'를 자연으로부터 전적으로 제거하고 오직 한결같은 기하학적 '연장(延長)'으로서 이해한다. 이리하여 살아 있는 자연을 원형으로 한 그리스의 유기적 자연관은 생명을 배제한 무기적 자연, 오로지 수학적·인과적으로 취급되는 죽은 자연을 원형으로 삼는 것으로 크게 바뀌었다. 생명적 자연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이러한 자체가 빛깔도 냄새도 없는 연장만을 가지는 수학적·물리적 자연이 특별한 배치(配置)를 받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아직도 우리들은 본질적으로는 이러한 데카르트적인 자연관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