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이천

[ 李蕆 ]

요약 조선 전기의 무신 ·과학자. 경자자, 갑인자를 만드는 등 세종대의 인쇄술 발달에 크게 공헌했고 간의, 혼의, 앙부일구 등 천문기구의 제작을 지휘했다. 평안도 도절제사로 여진족을 토벌하고 4군의 설치를 건의해 실현했다.
출생-사망 1376 ~ 1451
본관 예안(禮安)
불곡(佛谷)
시호 익양(翼襄)
활동분야 정치, 과학

1376년 경상도 예안현 이상동(李相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예안(禮安)이며 는 불곡(佛谷)이고 시호는 익양(翼襄)이다. 군부판서(軍部判書) 이송(李竦)의 아들이며 그의 집안은 문인으로서 조부 이승(李昇)은 종3품의 성균관 좨주를 지냈다. 어머니는 고려말 권세가였던 염흥방의 누이동생이었는데 염흥방의 전횡으로 그와 연관된 자는 모두 참수형에 처해지고 사형자의 처와 딸은 관노가 되었고 어린 젓먹이는 임진강에 던져죽였다. 이천의 부친은 참수형을 당했고 이천도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으로 내몰렸으나 승려의 도움을 받아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의 어머니 염씨는 개성윤(開城尹)을 지냈던 변남룡에게 개가하였고 목숨을 부지하였다. 하지만 하륜의 외친이기도 하였던 변남룡은 태종 때 이양우, 이천우, 이숙을 "태상왕(이성계)를 끼고자 한다"는 무고죄로 처형되고 말았다. 이런 연유로 이천은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은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의 행정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1393년(태조 2) 하위무관직인 별장(別將)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섰다. 1402년 무과 초시에 급제하고, 1410년 무과 중시에 각각 급제하여 동지총제(同知總制) ·충청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1415년 공조참판으로 부임하여 황해도 일대 은광(銀鑛) 개발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419년 우군부절제사가 되어 대마도 정벌에 가담하였다. 그 공적으로 좌군동지총제가 되었으며 경상해도 조전절제사가 되어 경상도로 파견되었다. 1420년 충청도 병마도절제사가 되었고 세종의 명을 받아 경자자(庚子字)를 만들고, 도성을 보수하는 역을 겸직하였다. 표준저울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였고 중국에서 견문한 사륜차를 개발하였다. 1431년에는 근정전의 화재에 대비하여 갈고리를 장치하기도 하였다. 조선의 군선(軍船)을 개량하고 노궁(弩弓)개발하였고 악기를 개선하였다.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간의(簡儀) ·혼의(渾儀) ·앙부일구(仰釜日晷) 등 천문기구의 제작을 지휘했다. 1437년 평안도 도절제사로서 여진족을 토벌하고 4군의 설치를 건의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그해 10월 노모 염씨를 만나기 위해 귀향하자 세종은 그를 위한 잔치를 베풀어 줄 정도로 세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1440년 이천이 수비를 담당했던 북방에 여진족이 침략하여 노략질을 재차하자 국경수비의 책임을 지고 파직되어 천안으로 귀양을 갔다. 1441년에 방환되고 1442년 산릉수리도감 제조가 되어 건원릉 수리를 담당하였다. 1443년 중추원사가 되고 화포와 무기 등을 개량하였다. 1445년 세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강에서 함포를 사격하는 수군훈련을 실행하였다. 1450년 정2품 벼슬인 판중추원사에 올라 세종으로 부터 궤장을 하사 받았다. 이천은 무신으로서 요직을 역임하면서 세종 대의 과학기술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뇌물과 관련되어 세종의 질책을 받았고 부정이 많이 드러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외숙이었던 염흥방의 사건이 다시 회자되기도 하였다.

참조항목

서정록

역참조항목

통감속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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