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미교

오두미교

[ 五斗米教 ]

요약 중국 후한 말기에 나타난 도교의 일파로 정치적으로 혼란된 상황에서 백성들에게 종교적 구원을 선전하여 크게 성행하였다.

역사

태평도(太平道)와 함께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난 도교(道教)의 종교 교단이다. 2세기 전반 후한(後漢) 말기에 장릉(張陵)이 쓰촨 성[四川省] 청두[成都] 근교의 학명산(鶴鳴山)에서 창시하였다. 입도자에게 다섯 말의 쌀을 바치게 한 데서 오두미교(五斗米教)라는 명칭이 비롯되었고, 오두미도(五斗米道)라고도 한다. 줄여서 미무(米巫), 미적(米賊), 미도(米道)라고도 불렸다. 창시자인 장릉을 천사(天師)로 숭배하여 천사교(天師敎)·천사도(天師道)라고도 불렸다. 한편 북두칠성(北斗七星)과 남두육성(南斗六星) 등 오방성두(五方星斗)를 숭배한 데서 오두미교라는 명칭이 비롯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장릉은 원래 유학에 정통했으나 장생법(長生法)을 수행하다가 노자를 비롯한 수많은 신선들에게서 정일맹위도(正一盟威道)를 배웠다고 전해진다. 그는 영혼을 정화함으로써 병을 치료하고 영원불사의 신선(神仙)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은 쓰촨 지역의 소수민족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으며, 후한 말기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어려움에 빠져 있던 백성들에게 종교적 구원을 제시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장릉이 죽은 뒤에 그의 아들인 장형(張衡)과 손자인 장로(張魯)가 교주의 지위를 계승하여 교법과 교단 조직을 정비하였다. 장릉과 장형, 장로의 3대를 삼장(三張)이라고 하는데, 특히 장로는 장수(張脩)가 이끌던 도교의 교단을 흡수하여 한수이[漢水] 북쪽의 한중(漢中) 지방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후한 말기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이 지역에서 일종의 종교 왕국을 세워 215년 조조(曹操)에게 투항할 때까지 30년 가까이 지배하였다. 조조에게 투항한 뒤에 장로는 제후로서 대우를 받았으나, 수많은 신도들이 북쪽으로 강제 이주되면서 교단 조직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 뒤 동진(東晉)이 건국되자 오두미교도 장시 성[江西省] 잉탄[鹰潭]의 롱후산[龍虎山]으로 거점을 옮겼다. 오두미교는 강남(江南)의 농민층에도 크게 확산되었는데, 399년 손은(孫恩)은 오두미교의 교도들을 이끌고 농민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5세기 초반 북위의 구겸지(寇謙之)는 오두미교를 혁신하여 신천사교(新天師敎)를, 남위의 육수정(陸修靜)은 유교 윤리와 도교의 비술을 결합시키려고 했던 갈홍(葛洪)의 사상을 계승하여 남천사도(南天師道)를 세웠다. 그 뒤 당(唐)·송(宋) 시대를 거치며 오두미교는 도교의 상청파(上淸派)·영보파(靈寶派)·정명파(淨明派) 등과 통합되었으며, 원(元) 나라 때에는 정일교(正一敎)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전진교(全眞敎)와 함께 도교의 가장 큰 종파로 이어지고 있다. 

장릉의 후손은 지금까지도 정일교에서 장천사(張天師)의 지위를 계승하고 있으며, 장릉의 4대손인 장성(張盛) 때부터 대대로 장시 성[江西省] 롱후산[龍虎山]에 거주하여, 롱후산은 도교의 중심지가 되어 왔다. 그러나 1949년에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본토를 장악하자, 63대 장천사인 장언푸[張恩溥]는 타이완으로 교단의 중심을 옮겼다. 

교리와 교단 조직

오두미교는 노자를 교조(敎祖)로 숭배했으며, <도덕경(道德經)>과 장릉이 펴낸 <노자상이주(老子想爾註)>를 기본 경전으로 삼았다. 여러 신과 신선들을 숭배하는 다신교였으며 신선이 되어 장생(長生)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강신(降神)과 축귀(逐鬼)를 위해 부적와 주문을 사용하는 등 주술적인 성격이 강했는데, 이러한 주술성은 쓰촨 지역 소수민족들의 무속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나중에는 행기(行氣)와 도인(導引) 등도 중요하게 여겼다. 

종교적인 믿음으로 질병을 치료하고 장생할 수 있다고 하여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는데, 자신이 저지른 죄를 하늘과 땅과 물의 신들에게 고백하고 반성하면 영혼이 정화되어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신도들에게는 음주와 살생, 도적질과 음행을 금했다.

오두미교는 국가의 행정체계를 본 뜬 체계적인 교단 조직으로 운영되었다. 각 교구(敎區)를 치(治)라고 했는데, 장릉은 오두미교의 24치를 창설했다. 각 치에는 도공(都功)이라고도 불리는 치두(治頭)를 두었으며, 그 아래에 좨주(祭酒)·간령(姦令)·귀리(鬼吏)·귀졸(鬼卒) 등의 직급을 두었다. 처음 입도한 일반신자를 귀졸(鬼卒)이라고 했으며, 좨주가 각 치에서 주요 교무를 담당했다. 각 치마다 도장(道場)을 설치했고, 유민(流民)에 대해 공짜로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제공하는 의사(義舍)도 두었다. 이러한 교단 조직은 신자들이 자치조직을 중심으로 강하게 결속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정치조직의 성격까지도 지니고 있어 오랜 기간 동안 중국 농민층 내부에서 영향을 끼치고 농민 봉기의 구심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참조항목

도교, 장도릉, 태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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