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은

손은

요약 중국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 동진(東晉)의 민란(民亂) 지도자로 399년 오두미도(五斗米道) 교도(敎徒)를 이끌고 민란(民亂)을 일으켰다.
출생-사망 ? ~ 402
영수(靈秀)
국적 중국 동진(東晉)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중국 산둥성[山東省] 자오난[膠南]

중국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 동진(東晉, 316~420)의 도사(道士)로 자(字)는 영수(靈秀)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 오(吳)의 (孫堅, 155~191)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낭야(琅琊, 지금의 山東省 膠南) 출신이다. 숙부(叔父)인 손태(孫泰, ?~398)가 두자공(杜子恭)에게 비술(秘術)을 배워 오두미도(五斗米道)의 교주(敎主)가 되자, 그를 도와 강남(江南) 지역에서 교세(敎勢)를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398년(晋 安帝 隆安 2년), 손태(孫泰)가 회계내사(會稽內史) 사유(謝輶)에게 모반(謀叛) 혐의로 고발(告發)되어 처형되자, 손은(孫恩)은 교도(敎徒)들을 이끌고 [浙江省] 해역(海域)의 주산군도(舟山群島)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399년 봉기하여 협구(浹口, 지금의 鎭海口)를 거쳐 회계(會稽, 지금의 浙江省 紹興)를 공격해 점령했다. 회계(會稽)를 점령한 뒤에 손은(孫恩)은 스스로를 정동장군(征東將軍)이라고 칭했으며, 교도(敎徒)들은 그를 ‘장생인(長生人)’이라고 불렀다.

민란(民亂)은 옛 오(吳)의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곳곳에서 백성들의 봉기가 이어져 반군(叛軍)의 규모는 수십만에 이르렀다. 동진(東晉) 조정(朝廷)은 민란(民亂) 진압(鎭壓)을 위해 서주자사(徐州刺史) 사염(謝琰, ?~400)과 도독오군군사(都督吳郡軍事) 유뢰지(劉牢之, ?~402)를 파견하였다. 400년(隆安 4년), 손은(孫恩)의 반군(叛軍)은 여요(餘姚, 지금의 浙江省 余姚)와 상우(上虞, 지금의 浙江省 上虞)를 공격했으며, 산음(山陰, 지금의 山西省 朔州) 북쪽의 형포(邢浦)에서 진군(晉軍)을 기습하여 사염(謝琰)과 왕희지(王羲之, 303~361)의 아들인 회계내사(會稽內史) 왕응지(王凝之) 등을 죽였다. 그러나 유뢰지(劉牢之)가 이끈 진군(晉軍)에 패하여 해상(海上)의 섬으로 피신하였으나, 임해(臨海) 등 저장성[浙江省] 동부 해안 지역에서 전투를 계속하였다.

402년(晋 安帝 元興 원년), 손은(孫恩)은 임해태수(臨海太守) 신경(辛景)에게 패하여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손은(孫恩)이 ‘수선(水仙)’이 되었다며 교도(敎徒) 100여명이 함께 죽었고, 손은(孫恩)의 매부(妹夫)인 노순(盧循, ?~411)과 서도복(徐道覆, ?~411)이 남은 무리를 이끌었다. 동진(東晋) 조정(朝廷)은 노순(盧循)과 서도복(徐道覆)을 회유하기 위해 광주자사(廣州刺史)와 시흥상(始興相)의 직위(職位)를 주기도 했지만, 민란(民亂)은 411년(義熙 7년)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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