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제

영락제

[ 永樂帝 ]

요약 명나라 제3대 황제(재위 1402∼1424). 지방의 번왕(蕃王)으로 연왕(燕王)이라 불렸으며 건문제가 공격해오자 난을 일으켜 황제가 되었다.
출생-사망 1360.5.2 ~ 1424.8.5
국적/왕조 중국 명(明)
재위기간 1402년∼1424년
본명 휘 주체
별칭 묘호 태종(太宗)
활동분야 정치

태조 홍무제(洪武帝:주원장)의 넷째 아들이며 묘호 태종(太宗)이다. 후에 성조(成祖)로 개칭하였으며, 연호에 따라 영락제(永樂帝)라 일컬어졌다. 처음에는 연왕(燕王)으로 베이징[北京]에 봉해졌으나, 홍무제가 죽은 뒤 적손(嫡孫)인 건문제(建文帝)가 즉위하여 삭봉책(削封策)을 취하자 1399년에 거병(擧兵)하였다. 건문제의 황제군과 연왕의 군대는 3년의 격전을 벌렸다. 황제군은 연왕의 군대에 비해 훨씬 많은 병력이었지만 이를 지휘할 경험있는 장수가 부족하였다. 이는 건문제의 할아버지인 주원장에 의해 역전의 노장들이 모두 숙청되었기 때문이었다. 연왕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공격하여 수도 난징[南京]을 함락하였다. 건문제는 황궁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으며 승려으로 변장하여 은거하였다는 설이 전해진다. 난징을 함락하여 황제의 제위에 오른 연왕이 주원장의 4째아들 주체(朱棣) 이며 그가 영락제(永樂帝)이다.(이를 정란(靖難)의 변이라고 한다.).

이어 산둥성[山東省]의 지닝[濟寧]과 린칭[臨淸] 간의 후이퉁허[會通河]를 개준(改浚)하여, 대운하의 양도(糧道)를 열었다. 1421년 북평으로 수도를 옮겨 베이징이라 고쳤으며, 수도의 터전을 닦았다. 영락제의 치정에서 가장 현저한 것은 주변지역에의 대규모 정벌과, 그것에 의한 명나라 국경의 확보이다. 즉, 동북지방에서는 헤이룽강[黑龍江] 하류에 누르간도사[奴兒干道司]를, 백두산[白頭山, 중국명 창바이산(長白山)] 북쪽에 건주위(建州衛)를 두었다.

그 뒤로 많은 위소(衛所)를 두어 여진부족을 통할하고, 타타르해협에서부터 남만주에 이르는 땅을 지배하였다. 몽골은 원(元)나라가 멸망한 뒤 분열상태에 있었으나 영락 초년 동부에 타타르, 서북부에 오이라트가 일어나 북변에 압력을 가하였다.

영락제는 1410년 스스로 고비사막 북쪽에 원정하였고 이후 1424년 진중에서 병사할 때까지 5차례의 친정(親征)으로 그 위협을 막았다. 서남지역에서는 티베트로부터 조공을 받았고, 소수민족을 눌러 구이저우 포정사사[貴州布政使司]를 두었으며, 1406년에는 안남(安南: 베트남)과 수마트라까지 원정하여 교지 포정사사(交趾布政使司)를 두고 직할지배하에 넣었다.

환관 정화(鄭和)로 하여금 대함대를 이끌고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를 거쳐 아프리카 케냐 해안까지 7회에 걸친 대원정군을 보내어 명나라를 해외에 과시하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당시 정화의 함대는 역사 이래 최대의 선단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를 일본국왕에 봉하여 왜구를 누르고, 감합무역(勘合貿易)의 길을 연 것도 그의 시대였다. 내정면에서는 문화정책에 힘을 기울여 2만여 권에 이르는 일대유서(一大類書) 《영락대전(永樂大典)》(1408) 외에 《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을 편찬시켜, 주자학의 국가교학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러나 그의 시기에 환관이 대두하기 시작하여, 이후 명나라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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