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노세키조약

시모노세키조약

[ 下關條約(하관조약) ]

요약 청·일전쟁의 전후처리를 위해 1895년 4월 17일 청국과 일본이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체결한 강화조약.
시모노세키 청일강화기념관

시모노세키 청일강화기념관

일시 1895년
장소 시모노세키
목적 청·일전쟁 전후처리
가입국가 청, 일본

조약의 배경

1894년 5월(고종 31) 조선은 동학농민운동(동학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일본톈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였고,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대립하였다.

1894년 5월 7일 조선은 동학농민군과 전주 화약에 합의하여 동학농민운동을 일단 진정시켰다. 그리고 청과 일본에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에 개혁이 필요하며, 동학농민운동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이를 거부하였다. 조선 역시 개혁은 일본의 철수 이후에 진행될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7월 23일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내세웠다. 또한 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7월 25일 선전포고 없이 아산 앞바다의 풍도(豊島)에 주둔하던 청 해군을 기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청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7월 29일에는 성환(成歡), 9월 15~17일에 평양(平壤), 9월 17일 압록강 어귀 해양도 앞바다에서 청의 북양함대(北洋艦隊)와 일본 해군이 충돌하여 일본이 승리하였다. 10월에 일본은 만주로 진격하여 청의 금주성(錦州城), 11월에 여순(旅順)을 점령하였고, 1895년 1월 산둥성(山東省)의 위해위(威海衛)를 무너뜨려 북양함대를 궤멸시켰다.

조약의 체결

청은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의 강화협상에 나섰으나, 일본은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하지 않았다. 그러다 1895년 3월 24일 청의 전권대신(全權大臣) 리홍장(李鴻章)이 일본과의 협상 후 돌아가다가 일본인에게 습격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국제사회의 여론을 의식한 일본이 본격적인 강화협상에 나서게 되었다.

본격적인 강화협상은 1895년 3월 30일부터 진행되었다. 리홍장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3월 30일에 먼저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휴전 기간 동안 강화협상을 진행하여 4월 17일 전문(全文) 11개 조항의 강화조약, 각 3조항의 의정서(議政書) 및 별약(別約), 2조항의 추가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를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馬關條約]이라고 한다.

조약의 내용

시모노세키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청은 조선국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 ②청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와 타이완[臺灣] 및 펑후섬[澎湖島] 등을 일본에 할양한다 ③청은 일본에 배상금 2억 냥(兩)을 지불한다 ④청이 구미 열강과 체결한 통상 특권을 일본에게도 인정할 것 ⑤청의 사스[沙市]·충칭[重慶]·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의 개항과 일본 선박의 양쯔강[揚子江] 및 그 부속 하천의 자유 통항 용인, 그리고 일본인의 거주·영업·무역의 자유를 승인할 것 등이다.

조약의 영향

1895년 4월 23일 러시아·프랑스·독일 3국은 일본이 청에게 할양받기로 한 랴오둥반도를 다시 청에 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다[삼국간섭(三國干涉)]. 이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한 러시아의 조치였다. 일본은 아직 3국과 겨룰 힘이 없었으므로 이를 받아들였고, 시모노세키조약의 랴오둥반도 반환은 취소되었다. 대신 일본은 청으로부터 랴오둥반도 포기 대가로 3천만 냥의 추가 배상금을 받았고, 이는 일본의 자본주의 발전·군비 확장 등에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