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

전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

[ Stupa of Buddhist Monk Daegyeong from Borisa Temple Site, Yangpyeong (Presumed) , 傳 楊平 菩提寺址 大鏡大師塔 ]

요약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대현동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있는 고려시대 승탑.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전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

전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

지정종목 보물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소장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재지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산11-1번지 이화여자대학교
시대 고려
종류/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크기 높이 2.7m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대현동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 고려시대의 승려 대경대사(大鏡大師) 여엄(麗嚴)의 승탑(僧塔)으로 추정되는 탑이다. 승탑(부도)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하는 묘탑(墓塔)으로, 고승이 입적한 후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존경심을 나타내기 위해 세웠다. 양평 보리사지에서 함께 발견된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가 939년(고려 태조 22)에 세워졌기 때문에 전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도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양평 보리사지에 위치했으나, 1913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져 보존·전시되고 있다.

대경대사 여엄

여엄(麗嚴)은 862년(신라 경문왕)에 태어나 929년에 입적한 통일신라시대 ~ 고려시대 승려로,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기여한 고승을 가르키는 사무외대사(四無畏大師) 중 1인이다. 9세에 무량수사(無量壽寺)로 출가하여 주종(住宗)의 밑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공부하였으며, 19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다. 그 뒤 참선에 뜻을 두어 성주사에서 선법을 현양하고 있는 무염(無染)의 제자가 되어 수년간 수행하였다. 887년(신라 진성여왕 1) 무염이 입적한 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운거(雲居)에게서 심인(心印)을 받았으며, 909년(신라 효공왕 13)에 귀국하였다. 이후 전란을 피해 월악산·미봉산·소백산에 은거하였다가, 고려의 지기주제군사(知基州諸軍事) 강훤(康萱)이 고려의 태조에게 상문(上聞)하여, 태조의 부름을 받아 지평(砥平: 현 양평) 보리사(菩提寺)의 주지가 되어 후학 양성에 힘썼다. 여엄은 신라에서 고려로 왕조가 뒤바뀌는 시기에 고려 개국의 정당성을 인정해주고 태조의 불교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기에 이엄(利嚴), 경유(慶猷), 형미(逈微)와 함께 고려 왕실로부터 사무외대사라는 칭호를 받았다. 929년 여엄이 입적하자, 태조는 여엄에게 '대경(大鏡)'이라는 시호(諡號)와 '현기(玄機)'라는 탑호(塔號)을 내렸다.

승탑의 구성과 양식

화강암으로 제작된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승탑이다. 높이는 2.7m이며,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하대석·중대석·상대석을 얹어 구성했다. 하대석에는 사자, 구름,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중대석에는 극락정토에 깃들어 산다는 상상의 새 가릉빈가(迦陵頻伽)와 앉아서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을 조각하여 꾸몄다. 상대석의 밑면에는 앙련(仰蓮, 솟아오른 연꽃무늬)을 장식했다. 

탑신부는 승려의 사리를 보관하는 곳으로, 탑신의 8개의 면 중 4개의 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衆)을 조각하였고, 2개의 면에는 문(門) 모양을 새겼으며, 나머지 2면에는 보살상(菩薩像)을 새겨 장식했다. 지붕돌(옥개석)은 팔모지붕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서까래와 기왓골, 막새기와까지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지붕돌의 밑면에는 비천상(飛天像)과 꽃문양을 조각하였다. 

상륜부는 대부분 없어지고 보주(寶珠)만이 남아있으며, 보주에는 화염(火焰) 무늬가 새겨져 있다.

가치 및 의의

전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은 사무외대사 중 1인에 해당하는 여엄의 승탑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했던 팔각원당형 승탑을 계승한 승탑으로, 고려시대 초기에 세워진 승탑의 양식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비록 옥개석 일부가 훼손되었으나 전체적인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승탑 전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장식은 예술적인 가치가 뛰어나다. 이러한 이러한 학술적·역사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