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심관

사심관

[ 事審官 ]

요약 고려시대 향직(鄕職)을 통괄한 지방관.

호장(副戶長) 이하 지방의 자치적인 관리를 지배한 관직으로, 기원은 935년(태조 18) 고려에 항복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고 그 지방의 자치를 감독하게 한 데서 비롯된다. 임무는 향직(鄕職)의 감독 외에 신분의 구별, 부역의 공정, 풍속의 교정(矯正) 등 건국 직후 호족(豪族:지방 토족)을 중심으로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있었다. 이후 고려의 개국공신도 각기 자기 출신 주(州)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지방세력을 회유하게 하여, 신생국 고려 왕조의 관리로 흡수함으로써 그들의 불평을 없애려 하였다.

설치 당시에는 정원(定員) 규정이 없었으나 통치력이 강화되면서 차차 통제를 가하여, 성종 때는 500정(丁: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 이상의 주(州)에는 4명, 300정 이하의 주는 3명, 그 이하의 주는 2명으로 정하고, 다시 현종 초에는 아버지와 형제가 호장(戶長:自治長)인 사람은 사심관이 될 수 없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지방 출신의 귀족이 출신지의 사심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뒤에는 향리(鄕吏) 출신이 사심관에 임명되는 경우도 많아서, 1124년(인종 2)에는 향리의 자손은 비록 향역(鄕役:지방에서 향리가 치르는 부역) 등을 면하였다 하더라도 자기 처의 친척이 아직도 향직에 있으면 사심관이 될 수 없도록 규제하였다.

사심관제는 건국 초기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을 위한 특수 관직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관리로서 보다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기반도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중앙의 관원은 서로 출신지의 사심관을 겸임하려고 경쟁하였다. 사심관은 때로는 민폐를 끼쳐, 문종 이후에는 사심관의 임면을 맡은 사심주장사(事審主掌使)를 두어 이들에 대한 통제를 철저히 하였다.

그러나 국가가 안정되어 있을 때는 이들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으나, 명종 이후 중앙의 행정력이 약화되면서 사심관의 폐단이 커져 공전(公田)을 점유하고 막대한 민호(民戶)와 종들을 가로채어 사리를 취하는 등, 원래의 목적과는 판이한 성격의 존재가 되었다. 이에 1283년 충렬왕이 이 제도를 폐지하였으나, 얼마 뒤 세력 있는 호족이 스스로 사심관이 되어 노략질을 자행하여 그 폐단이 전보다 더 커졌다. 1318년(충숙왕 5) 충숙왕은 다시 주 ·현의 사심관제 폐지를 명하고 제폐사목소(除弊事目所)를 설치, 나라 안의 큰 폐단을 바로 잡게 하였다.

이듬해에는 사심관이 차지한 땅과 백성을 몰수하였는데, 민(民) 2,360호, 종 137명, 공전(公田) 1만 9798결(結), 사전(賜田) 1,227결, 위전(位田) 315결이라는 엄청난 수였다. 그러나 그뒤에도 사심관은 더 토호화(土豪化)하여, 중앙집권체제를 흔들리게 하고 지방민의 수탈자로 변하였다. 공민왕 때 신돈(辛旽)은 세력기반을 다지고자 오도사심관(五道事審官)을 시켜달라고 하였으나, '사심관은 도둑과 같다' 하여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사심관은 지방에서 토지·노비·농민을 사유화(私有化)하여 큰 세력을 이루었으나, 당시 고려 중앙정권의 법으로는 이를 금압(禁壓)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려 멸망 직전 이성계 주도하에 시행된 전제개혁(田制改革)으로 그 토지 등이 몰수되자 세력을 잃고, 조선시대에는 존속하지 못하였다.

참조항목

경순왕, 부호장, 향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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