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무덤

벽돌무덤

[ 塼築墳(전축분) ]

요약 벽돌[塼]을 이용하여 만든 무덤.

벽돌을 이용해 만든 무덤을 통틀어 벽돌무덤이라고 부른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는 벽돌과 함께 흙이나 돌, 나무 등의 재료를 섞어 만든 무덤도 벽돌무덤의 범주에 포함시켜 이야기한다. 중국 한(漢)나라부터 송(宋)나라에 이르기까지 많이 건축되었다. 한나라의 세력 확대와 함께 남으로는 베트남 북부까지, 동으로는 한국 대동강 유역까지 넓게 퍼졌다. 일반적으로 벽돌로 널방[玄室]을 만든 굴식벽돌방무덤[橫穴式塼室墓]을 말하지만, [棺, 관]이나 덧널[槨, 곽]의 형태인 구덩식[竪穴式]의 벽돌널무덤[塼棺墓]이나 벽돌덧널무덤[塼槨墓]도 있다. 벽돌방무덤의 경우에도 외방무덤[單室墓]과 두방무덤[二室墓] 외에 옆방[側室]까지 갖춘 여러방무덤[多室墓]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차이는 무덤 주인공의 지위와 관련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반도에서는 대동강 유역의 평양을 중심으로 과거 낙랑군과 대방군이 설치되었던 서북한 일대에서 2세기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3~4세기에 가장 활발하게 만들어졌고, 4세기 초 고구려가 낙랑군과 대방군 지역을 차지한 이후에도 한동안 벽돌무덤의 전통이 이어졌다. 늦게는 5세기 초까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남한지역에서는 백제가 웅진(공주)에 도읍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벽돌무덤이 확인된다. 서북한 지역의 벽돌무덤과 백제의 벽돌무덤 사이에 연관성은 찾을 수 없으며, 벽돌무덤의 전통이 단절되었다가 6세기 중국 남조(南朝)에서 유행하던 벽돌무덤을 백제가 수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 구조는 맨땅에 깊이 1m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바닥에 벽돌을 깔고 벽을 쌓아올려서 문이 있는 널방을 만든 다음 그 위에 흙을 덮어서 봉분을 만들었다. 바닥에는 벽돌을 두 벌 깔았고, 벽은 벽돌을 눕히고 세우는 것을 되풀이하면서 쌓아 올렸는데, 제일 밑에서부터 조금 안으로 기울어지게 하여 궁륭식(穹窿式) 천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널방의 앞벽에 짧은 널길[羨道]을 만들었고 그 밖은 무덤바깥길[墓道]로 되어 있다. 이것은 두번째 이후의 매장을 이곳을 통해서 한 전형적 굴식무덤임을 보여준다. 수직의 벽채 위에 굵은 나무 각재를 덮어 천장을 만드는 벽돌덧널무덤을 제외하고, 벽돌로 천장을 좁히면서 궁륭식 천장을 만드는 것이 전형적인 벽돌무덤의 천장이다. 다만 세부적으로는 돔형과 터널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서북한 지역의 벽돌무덤에서는 돔형의 천장만 확인되고, 터널형의 천장은 백제 벽돌무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북한 지역의 벽돌무덤은 말기로 가면서 벽돌과 돌을 섞여서 사용한 무덤이 만들어진다. 벽돌로 벽의 아랫부분만 쌓고 윗부분은 작은 판석을 안으로 좁혀들이며 쌓아서 맨 위에는 몇 장의 판석을 덮거나, 널방의 벽채는 벽돌로 쌓고 천장은 판석으로 덮는 형식이다. 이것은 벽돌무덤이 돌칸흙무덤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모습으로 파악된다.

벽돌무덤 본문 이미지 1

 

한편 웅진 도읍기의 백제에서 중국 남조와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그들의 벽돌무덤을 받아들였는데, 현재 확인된 벽돌무덤은 공주 무령왕릉(武寧王陵)과 송산리(宋山里) 6호분, 교촌리(校村里) 3호분 3기 뿐이다. 당시 백제에서는 주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만들어지고 있었고, 이들 벽돌무덤은 매우 예외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이들 무덤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당시 만들어진 많은 굴식돌방무덤과 같으며, 다만 돌 대신에 벽돌을 썼을 뿐이다. 송산리 6호분에는 사신도(四神圖) 벽화가 그려져 있기도 하다. 그 외 송산리 5호분에서는 관대(棺臺)를, 송산리 29호분에서는 널방의 바닥을 벽돌로 깐 사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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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동영상

무령왕릉 백제 무령왕릉을 디지털 복원한 영상.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