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미술

백제미술

[ 百濟美術 ]

요약 백제의 건국시기인 BC 18년부터 7세기 후반 멸망하기까지 백제영역에서 일어난 미술활동.
백제 3~4세기 수막새

백제 3~4세기 수막새

백제는 마한(馬韓)의 한 국읍(國邑)세력의 일파로써 백제국(伯濟國)이 성장, 발전하여 이룩한 국가이다. 기록에 의하면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한 북방 이주민으로, 종족적으로 고구려와 같은 뿌리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백제미술의 근간은 고구려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신라가 국가를 성립, 거듭 발전하면서 각국간에 정치·경제·지역적인 환경의 차이, 대외관계 등에 따라 상호 견제와 영향으로 독자적인 미술활동을 하였다. 백제시대 미술의 발전 단계는 정치적인 변천과 맥락을 같이하여 3기(期)로 나누고, 한성시대(漢城時代:BC 18∼475년), 웅진시대(熊津時代:475∼538년), 사비시대(泗沘時代:538∼663년)로 왕도의 천도와 같이 구분하고 있다.

삼국시대의 가장 큰 사상적인 변화는 무엇보다도 대륙에서 전래된 불교사상과 그 영향을 받은 미술품이다. 불교는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고구려보다 12년 후인 침류왕 2년(384년)에 전래되었지만, 중국에서는 남조에 해당되는 동진(東晉)으로부터의 전래라는 점이 특이하다. 이전에도 외국의 문물이 직접 교류되어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자극받고 있음을 고분(古墳)의 축조나 출토유물의 성격에서 볼 수 있다. 불교의 영향으로 한성시대부터 사찰의 건축과 불상을 조성하였으며, 불교 용구의 생산은 백제의 한성시대부터 사비시대까지 이어져 문화의 핵심이 되었다.

한성시대는 초기의 약 500년간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현존하는 미술품은 거의 전무하며, 고고학적 발굴자료에 의해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문헌자료에 의하면 마한이 3세기 후반부터 진나라에 조공무역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계의 돌무지무덤[積石塚]인 경기 양평, 문호리, 삼곶리, 가락동, 석촌동, 연천 등에서 토기, 대롱옥[管玉], 널무덤[土壙墓]출토 흑유(黑釉)거치무늬 토기 등이 있다.

중국 동진에서 수입된 4∼5세기 미술품은 청자 도연편(陶硯片), 흑갈유 전문편(錢文片), 청자 사이호(四耳壺), 법천리 청자양형기(羊形器), 화성군 천계호(天鷄壺) 등이 있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한산에 절을 세우고 승려를 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유적과 유물이 없다. 이 시기에 예배대상인 불상 등은 전래되거나 제작되었지만 귀걸이 이외의 장신구 등의 금속공예품은 거의 없다.

웅진시대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백제세력이 위축되면서 64년간 천도했던 시기로 초기에는 지방호족과의 다툼으로 혼란하였으나 곧 국내를 정비하여 신라와 동맹을 맺고, 불교를 발전시키는 한편, 중국 양(梁)나라와 문물을 교류하여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만들었다. 6세기 전반기에 축조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속공예품을 위시하여, 새로운 전축분 축조, 대통사(大統寺) 창건, 수원사(水源寺) 등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불교중흥의 바탕을 이룩하였다. 불교에서 외래양식 수용은 북위와 동·서위 양식을 받아들여 강건한 기상이 보이는 한편, 백제적인 우아함과 세련된 기법을 볼 수 있다.

사비시대는 백제의 웅비(雄飛)의 시기이며, 부여는 마지막 천도로 123년 동안 수도였다. 성왕(523∼554)은 백제의 중흥의 왕으로 불교를 장려하고, 중국 양나라와 교류을 통해 새로운 문물을 흡수하였다. 미륵사(彌勒寺), 왕흥사(王興寺)와 같은 대찰을 창건하여 "사찰과 탑이 매우 많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부흥하였다. 중국 양쯔강[揚子江] 유역의 남조(南朝)문화 뿐만 아니라, 그 이후 북조예술의 요소도 보이며, 백제미술은 국제적이고, 개방적이면서 백제적인 특징을 찬란하게 승화시킨 절정기의 높은 수준이 가늠된다.

백제미술의 특성은 북방적인 고구려 문화 요소를 토대로 하여 시대성·자연환경·토착성·인위적 창조성을 갖고, 서남의 바다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외교를 통해 받아들여 진취적으로 수용, 창조적으로 융화하여 찬란한 백제적인 미술품을 재창조하였다. 나아가 일본에 백제문화를 전파하여 일본문화 형성의 기조를 이루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