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걸
[ 白仁傑 ]
- 요약
조선 중기의 유학자. 선조 때 직제학·이조참판·대사간·대사헌을 거쳐 공조참판으로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임했다. 대사헌이 되어 권신(權臣) 등의 비위를 논핵(論劾)하다가 사임하였다. 청백리(淸白吏)로 뽑혀 기록되었다.
출생-사망 | 1497 ~ 15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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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수원 |
자 | 사위 |
호 | 휴암 |
시호 | 충숙·개시·문경 |
본관 수원(水原), 자 사위(士偉), 호 휴암(休庵), 시호 충숙(忠肅)·개시(改諡)·문경(文敬)이다. 조광조(趙光祖)의 제자이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스승과 동지를 모두 잃고 실의 끝에 금강산에 들어갔다. 그후 돌아와 1537년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오래 있다가 검열·예조좌랑·남평(南平) 현감·호조정랑·지평·헌납을 역임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소윤(小尹)에 의해 파직되고 1547년 정미사화에 연루되어 안변(安邊)에 유배되었다.
1551년에 풀려나와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소윤의 거두 윤원형(尹元衡)이 죽자 복직하고 1567년(명종 22) 70세로 교리(校理)가 되었다. 선조 때 직제학·이조참판·대사간·대사헌을 거쳐 공조참판으로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임하고 다시 대사헌이 되어 권신(權臣) 등의 비위를 논핵(論劾)하다가 사임하였다.
1578년(선조 11)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이듬해 동서분당(東西分黨)의 폐단을 지적하고 군비확장을 강조하였다. 선조 때 청백리(淸白吏)로 뽑혀 기록되었으며 학문에도 뛰어났다. 남평의 봉산(蓬山)서원, 파주(坡州)의 파산(坡山)서원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