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스 메테르니히

클레멘스 메테르니히

[ Klemens Wenzel Nepomuk Lothar von Metternich ]

요약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베를린·파리 주재공사, 외무장관 등을 지냈고 대(對)나폴레옹 해방전쟁에서 승리한 후, 빈회의 의장으로서 유럽의 질서 회복을 위한 외교상의 지도권을 장악하였다. 재상이 된 이후 정책 실패로 실각, 망명하였다.
출생-사망 1773.5.15 ~ 1859.6.11
국적 오스트리아
활동분야 정치

라인 지방의 유서 깊은 귀족가문 출신으로 1790년 마인츠대학교에 다니면서 마인츠 선거후(選擧侯)의 궁정에 드나들며, 당시 여기에 모여든 망명귀족들을 통하여 프랑스혁명을 알았다. 1792년 마인츠가 혁명군에게 점령당하자 부친이 있는 브뤼셀에 가서 부친을 도와 혁명의 파급을 막는 현실정치에 처음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부친의 후광과 1795년 전(前) 재상인 카우니츠의 손녀와 결혼하여 정계에의 진출이 용이해졌다. 1801년 드레스덴 주재 공사, 1803년 베를린 주재 공사를 거쳐 1806년 파리 주재 공사가 되어 나폴레옹을 타도할 기회를 타진하였다. 1809년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개전한 것도 그의 정세판단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러나 이 전쟁은 패전으로 끝났다. 그 해 외무장관이 되었고, 프란츠 1세의 딸 루이즈와 나폴레옹의 결혼을 주선하기도 하여 프랑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사이에 국력의 회복을 도모하였다.

1813년 여름 심기일전하여 대(對)나폴레옹 해방전쟁에 참가하여 승리한 후, 빈회의 의장이 되어 유럽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외교상의 지도권을 장악하였다. 그 지도이념은 1815년에 만들어진 질서의 유지와 유럽 대국들의 세력균형이었다. 이를 위하여 독일에 대해서는 독일연방의회를 통하여, 또한 범(汎)유럽에 대해서는 신성동맹과 4국동맹을 이용하여 현상을 변혁하려는 모든 국민주의·자유주의 운동을 탄압하는 동시에 대국간의 이해가 대립하여 전쟁으로 발전하는 일을 극력 피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현상유지책은 단순한 신념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민족국가의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오스트리아가 국가로서 유지될 수 있다는 현실주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1821년 재상이 된 그의 정책은 그리스의 독립과 7월혁명으로 파탄에 빠졌고, 1848년 3월혁명에 의하여 실각,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후에 귀국하여 황제 프란츠 요셉 1세의 정치고문으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