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 Vladimir Vladimirovich Mayakovskii ]

요약 러시아의 대표적인 미래주의 시인·극작가로, 15세 때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한 후 반체제 활동으로 여러 번 체포되었다. 1912년에는 동료들과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라는 미래주의 선언문을 담은 책을 발간하였으며, 작품을 통해 스탈린 체제의 권위주의와 새로운 경제정책과 함께 나타난 기회주의를 풍자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배반의 플류트》(1916), 《전쟁과 세계》(1917), 《인간》(1918) 등이 있다.
브라디미르 마야콥스키의 동상

브라디미르 마야콥스키의 동상

출생-사망 1893.7.19 ~ 1930.4.14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조지아
주요작품 《배반의 플류트》(1916) 《전쟁과 세계》(1917) 《인간》(1918)

20세기 초 러시아 미래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며 극작가로서, 1893년 러시아 제국의 바그다디(현재 그루지아 영토)에서 산림 감시원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06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가족이 모스크바로 이사하였다. 15세 때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한 후 반체제 활동으로 여러 번 체포되었다. 초기에는 어린 나이 때문에 금방 풀려났으나, 16세 때는 11개월간 독방에 감금되었고, 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다. 석방된 후 모스크바 미술 학교에 다니면서, 자신보다 10살이 많은 미래파 화가이자 작가인 다비드 브를류크와 절친한 친구가 된다. 브를류크는 마야코프스키의 시를 단 한 편 읽은 후 사람들에게 그를 천재 시인으로 소개할 정도로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마야코프스키는 브를류크와 함께 러시아 미래주의 모임인 "길레야"에 합류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모임의 대변인이 되었다. 1912년에는 브를류크, 흘레브니코프, 크루초니흐 등과 함께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라는 미래주의 선언문을 담은, (선언문과) 같은 제목의 출판물을 발간하는데, 여기에 그의 시 《밤》과 《아침》이 실리면서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다. 그들의 선언문은 그때까지 모범적 모델로 제시되어 온 모든 예술적 전통을 과감히 때려부수자는 과격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13년에는 자신의 첫번째 시집 《나》와 모노드라마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를 발표하였고, 후자가 상트 페테르브르크에서 초연 될 때 마야코프스키 자신이 직접 배우로 출연하였다. 이후 자신의 대표작인 《바지를입은구름》(1915)과 《등골의 플룻》(1916)을 발표한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의 군용 자동차 학교에서 일하던 중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열렬히 지지하였고, 《혁명 송시》(1918),《좌익 행진》(1919)과 같은 작품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이후 소련 전신국에서 일하면서(1919-1921) 볼셰비키 선전 포스터에 삽화와 문구를 넣는 일을 하기도 했고, 1924년에 레닌이 사망했을 때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3000행에 달하는 장시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 정부에 대해 점차 반감을 가지게 되면서, 스탈린 체제의 권위주의와 당시 신경제 정책과 함께 나타난 기회주의를 풍자하는 희곡 《빈대》(1929)와 《목욕탕》(1930)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소련의 저명한 작가로서 성공한 마야코프스키는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 국가들과 미국, 멕시코, 쿠바 등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의 작품 세계도 그 영향을 받았다. 그는 사랑에 있어서도 열정적이었는데, 자신과 절친했던 평론가 오십 브릭의 아내였던 릴리야 브릭을 사랑했었고, 미국에 강연 여행 도중에 만난 엘리 존스와의 사이에서 자신의 딸이 태어난 것을 뒤늦게 알기도 했다. 1928년에는 프랑스에서 타찌야나 야코블레바를 만나 그녀와 결혼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바치는 시로 <타찌야나 야코블레바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다. 그 후 배우였던 베로니카 폴론스카야를 만났으나, 안정적인 관계를 이어가지는 못했다.

1920년대 말에 그는 문학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스탈린 체제 속에서 당의 노선 변화와 독자들의 기호 변화는 그의 문학을 점점 고립시켰다. 수년간 주요 작가로서 몸담고 있던 좌익예술전선에서 탈퇴한 후(1928), 오십 브릭과 함께 혁명예술전선에서 활동하였고, 이듬해에는 소련 작가 연맹,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작가 동맹에도 가입했지만 환대받지 못하였다. 그 무렵 발표한 풍자극 <빈대>와 <목욕탕>에 대해서도 잇따른 비판이 쏟아졌는데, 특히, 그 무렵 영향력을 키워 가고 있던 프롤레타리아 작가 동맹 진영의 비판이 거셌다. 정부 당국과의 적대적인 관계와 문학적인 고립으로 그는 점차 지쳐갔고, 잇따른 사랑의 실패까지 겪게 된 그는 1930년 4월 14일 모스크바에서 권총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해서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가 죽었을 때 그와 절친했던 브릭 부부가 해외에 나가 있었던 점, 사체에서 나온 총알이 그가 가지고 있던 총과 일치하지 않았던 점, 이웃들이 두 발의 총성을 들었다고 진술한 점 등을 의혹으로 제기하고 있다.

기존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깨고, 파격적인 형식과 내용을 담은 새로운 문학을 추구했던 마야코프스키는 러시아 미래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사망한 후에 소련의 시인들과 언론으로부터 형식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명예를 회복하였다. 그의 사후 그의 출생지는 그의 이름을 따서 "마야코프스키"로 이름이 바뀌고(1930), 모스크바에는 마야코프스키 역이 생겼으며(1938), 1976년에는 모스크바 중심부의 마야코프스키가 살았던 건물에 마야코프스키 박물관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