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혁명에서 소련붕괴까지의 러시아연극

11월혁명에서 소련붕괴까지의 러시아연극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의 러시아 연극은 초대 교육인민위원이 된 극작가 A.루나차르스키의 지도 밑에 전적으로 교육인민위원회가 장악하였다. 혁명기에 수많은 무대 예술인들이 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국내에 머무른 연극인들은 사회주의연극에 동원되는 외에는 달리 활로가 없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연극적 기술이나 형태에 대한 실험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몇 해 동안은 활기를 띠는 듯하였다. 민간 연극이 널리 확산되어 100여 명의 민중이 참가하는 도 가끔 상연되었다. 극단이나 연극클럽 ·협회 수가 급증하는가 하면 젊은 연출가들은 대담한 수법을 실험하였다.

그 가운데 뒷날 영화로 전향한 S.예이젠시테인과 L.트라우베르그가 있었다. 혁명 이후, 18년까지 ‘시어터옥터버(연극의 10월)’가 발족하여 대중을 상대로 하는 선전극이 공연되었다. 여기에는 배우 출신의 연출가 V.메이예르홀트가 참여하였다. 그는 18년 V.마야콥스키의 희곡 《미스테리야 부프》를 상연하는 한편, 20년에는 ‘시어터옥토버’ 선언을 통하여 연극이 담당할 정치적 과제에 강한 관심을 표시하였다. 모스크바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메이예르홀트극장을 개설한 후 더욱 대담하게 연극적인 연극을 추구하면서 구성주의에 입각한 일련의 작품들을 상연하였으나 결국 부르주아적 형식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되었다. 메이예르홀트의 운명이 상징하듯 1930년대의 연극은 사회주의 리얼리즘극만이 강요되고 용납될 수 있을 뿐 다른 모든 연극 상연이 금지되었으며, 메이예르홀트 이외에도 많은 연극인들이 숙청되었다. 이렇듯 30년을 경계로 하여 다른 예술활동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연극의 상황은 점차 악화되어 갔다. 전위파의 탐구적인 실험이 철저한 탄압을 받는 가운데 퇴행적인 연극의 경향은 그 후 20년 이상이나 계속되었으며, 유형화(類型化)하고 열악해진 자연주의가 부활하여 활개를 쳤다. 30~40년에 걸쳐 활동한 극작가로는 《낙천적 비극》(34)을 쓴 V.비지네프스키를 비롯하여 N.포고딘, L.레오노프 등이 있으나 한결같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작품을 생산하는 데 그쳤다.

이 시기의 연출은 K.스타니슬랍스키의 이미 퇴색한 연극시스템에 얽매어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으며, 이와 같은 경향은 독단적이고 강제적인 색채를 강화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광범한 연극활동이 이루어졌으나 애국심을 고취하는 내용의 선전극에 불과할 뿐 비판대상이 될 만한 작품은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스탈린이 사망할 때까지 계속된 관료통제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그대로 반영해 주었다. 67년 이후, 메이예르홀트의 연극전통을 회복시키려는 시도가 일기 시작하면서 간결 ·평이한 상연방식이 겨우 모습을 드러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모스크바에 있는 마야콥스키극장의 연출가 N.오플로프코프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며, 마야콥스키의 미완성 ·미공개 작품들이 겨우 공연되기 시작하였다. 60년대 해빙기를 맞은 소련 연극계에는 새로운 극단들이 창설되었으며, 모스크바의 컨템퍼러리시어터는 예프레모프의 연출로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을 상연하였다. 또한 모스크바의 타간카극장은 시어터옥토버의 경향을 나타내는가 하면 레닌그라드의 고리키극장은 토브스토노고프의 연출로 선전극과 이념극에 식상한 관중에게 처음으로 신선한 정통극을 선보였다. 또한 유럽 국가의 작품들에도 문호를 개방하여 그것이 상연되는 빈도 또한 늘어났다.

그 중 비교적 자주 선택되는 작품은 A.밀러, J.사르트르, M.프리슈, F.뒤렌마트, 데 필리포 등의 희곡이다. 이 밖에도 아마추어 연극운동으로서의 콜호스연극을 비롯하여 군대연극 ·아동연극 등이 활발하다. 전문극단에게는 정부로부터 해마다 보조금이 지급된다. 그리하여 오늘날은 수많은 극장과 아마추어 극단, 그리고 수준 높은 직업적 배우들을 거느린, 그 조직이나 양적인 면에서 세계정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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