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가이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 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

요약 로마의 황제(재위 284~308)로 오리엔트식 전제군주정을 수립하였다. 2명의 정식황제 및 2명의 부황제에 의하여 분할통치하는 4분 통치제를 시작하였고 제국에 통일과 질서를 가져왔다. 군제 ·세제 ·화폐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페르시아에서 궁정예절을 도입하였고 많은 신전을 세웠다.
디오클레티아누스궁전

디오클레티아누스궁전

출생-사망 245 ~ 316
국적/왕조 로마
재위기간 284년~308년
활동분야 정치

이름은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느스(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이다. 로마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공화정적(共和政的)인 요소를 척결하였으며, 오리엔트식 전제군주정(專制君主政 : 도미나투스)을 수립한 황제이다. 이탈리아의 천민 출신으로, 하급 병사에서부터 입신하여 284년 황제가 되었다. 286년 부제(副帝) 막시미아누스를 정식 황제로 승격시키고, 제국 분할통치의 기초를 세워, 제국 내의 치안과 변경방위에 힘을 썼으나, 293년 2명의 정식 황제 및 2명의 부황제에 의하여 분할통치하는 4분 통치제, 즉 사두정치를 시작했다.

트라키아 ·아시아의 여러 주(州) ·이집트를 스스로 영유하여 니코메디아에 도읍하고, 막시미아누스에게는 이탈리아 ·아프리카 ·에스파냐를 맡기고, 메디오라눔(밀라노)에 도읍을 정하게 하였다. 갈레리우스에게는 시루미움에 있으면서 도나우 지방, 발칸(트라키아는 제외)을 통치하게 하고, 콘스탄티누스에게는 트레이브(트리엘)에 있으면서 서방 속주(屬州)를 통치하게 하였다. 4분통치는 군사적 ·행정적으로 적극적인 뜻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제위(帝位) 계승의 원칙을 정하고, 내란의 소지를 억제하는 것이었다. 갈리아의 바가우다이 난(亂)을 진압하고, 라인 ·도나우 유역에서 게르만 인을 격퇴했으며, 동방에서는 페르시아에 승리하고, 아르메니아를 회복하여 제국에 통일과 질서를 가져왔다.

또, 군제(軍制) ·세제(稅制) ·화폐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군제 개혁에서는 정규 군단 수를 40에서 약 60으로 늘려 총수 약 50만으로 하고, 각 속주에 주둔군(변경군)을 두는 동시에, 기동력이 우수한 야전군을 설치, 보병과는 별도로 기병을 배치하였다. 또 속주통치에는 문관 ·무관을 구별하고 속주를 세분하였다. 세제개혁으로는 토지의 단위와 인구의 단위를 결합한 농업과세제도, 카피타티오 유가티오를 정하고, 수공업자 ·상인의 수입에도 돈 또는 물품으로 세금을 매기어, 재정의 개혁을 꾀하였으며, 직업과 고향의 고정제도를 도입하였다. 화폐개혁으로는 새로운 은화(銀貨)를 주조하게 하고, 청동화(靑銅貨)를 유통시켰는데, 화폐가치 절하에 따라 물가등귀를 초래하였기 때문에 301년에 최고가격령을 발포하였다.

로마의 전통을 회복하고 제국을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옛 다신교(多神敎)를 회복하여 많은 신전을 세웠다. 치세 말기의 303년에는 공식적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금지하였다. 또한 기독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군사를 보내 진압하였는데 이는 박해가 아니라 반란의 진압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 305년 은퇴를 선언하고 갈레리우스를 동방의 정제로 임명하고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서방의 정제로 임명하였다. 이때문에 그의 4두정치체계는 힘의 균형을 이루어 안정적으로 로마제국을 운영하였지만 급속하게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내전으로 치달았다.

그의 말년에 동방의 부제로 있던 막시미누스가 딸과 아내를 볼모로 잡았다가 동방으로 유랑하며 떠돌도록 쫓아버렸다. 막시미누스가 리키니우스와 싸움에서 패해 처형되자 딸과 아내가 리키니우스를 찾아가 도움을 애원했지만 오히려 처형해버렸다. 이듬해 가이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도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