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민회

대한국민회

[ 大韓國民會 ]

요약 1919년 3·1운동 이후 평양에서 결성된 항일비밀결사.
구분 독립운동단체
설립일 1919년 9월
소재지 평양

평양 지역에서는 1917년에 이미 숭실학교(崇實學校) 재학생과 졸업생을 중심으로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라는 항일비밀결사가 조직되어 활동했었다. 이들은 동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해 지원 자금을 마련하는 등의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으나 1918년 주요 구성원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조직이 와해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뒤 그해 8월 평양(平壤) 신양리(新陽里)의 신학교에서 예수교 장로파 전국총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김기순(金基舜)·김승권(金承權)·김형복(金亨福)·노삼현(盧三賢)·이연희(李衍熙)·이헌교(李憲敎)·장지권(張芝權) 등의 예수교 장로파 인사들은 기독교인들을 결집해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해 조국 독립을 달성한다는 목적 아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들은 평양에 본부를 두고, 군(郡)에는 군회(郡會), 면(面)에는 향촌회(鄕村會)를 두어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박인관(朴寅寬)이 회장, 박승명(朴承明)이 총무, 전흥건(全興鍵)이 서기, 박치록(朴致祿)이 회계를 맡았으며, 전군보(全君甫)·임영석(林英奭)·고진한(高鎭翰)·황보덕삼(皇甫德三)·이치수(李致洙) 등이 평의원으로 주요 의사결정에 참여했다. 회원들에게는 3원의 입회금을 받았으며, 《대한민보(大韓民報)》라는 기관지를 발행해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특히 이연희·김형복·김승권·장초권(張楚權)·김기순·이헌교 등이 활동한 강서군회(江西郡會)는 길일리(吉逸里)·간성리(杆城里)·심정리(心貞里)·강서읍(江西邑)·태성리(台城里)에 향촌회를 조직했으며, 김태은(金泰殷) 등이 활동한 용강군회(龍岡郡會)도 진지성(眞池星)·어곡리(漁谷里) 등에 향촌회를 조직하며 세력을 확대했다. 
하지만 대한국민회는 1919년 말에 평양본부의 간부들이 대부분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활동이 중단되었다. 당시 집행부에서 예수교 장로이던 박승명만 일본의 검거를 벗어나 피신할 수 있었다. 그 뒤 염태익(廉太翊), 방진성(方眞成) 등 대한국민회에서 활동했던 많은 인물들이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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