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지역의 3 ·1운동

미주지역의 3 ·1운동

미주에서의 독립운동은 191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안창호(安昌浩) 등이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윌슨의 원칙이 비공식적으로나마 알려진 1916년 5월부터 이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해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고무적인 소식은 더욱 이들의 독립의식을 자극하였다.

따라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서는 1917년 10월 박용만(朴容萬)을 세계약소국 민족동맹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케 하여, 한국의 식민지적 현실을 호소하고 독립해야 함을 역설토록 하였다. 1918년 12월 1일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재미한인 전체 대표자회의(在美韓人全體代表者會議)를 소집하고 1919년 1월 18일부터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한국대표로 이승만(李承晩) ·민찬호(閔瓚鎬) ·정한경(鄭翰景) 3인을 선정하고 군자금으로 30만 원을 모금하기로 결정하였다.

뉴욕 일대에는 신한협회(新韓協會)가 조직되어 11월 말 이후 독립결의서와 진정서를 미국 국무성과 주요 정객들에게 전달하였다. 이승만 ·정한경 등은 대한국민회 중앙총회(大韓人國民會中央總會) 명의로 1919년 2월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독립을 호소하였고, 서재필(徐載弼)도 《이브닝 레저》지(誌)의 기자 베네딕트와 상의하여 한국문제를 세계여론에 호소함으로서 독립국가 건설의 의욕을 북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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