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혁명

농업혁명

[ Agricultural Revolution , 農業革命 ]

요약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공업상의 혁명과 병행하여 토지제도와 농업기술상에 일어난 현저한 변화.

인류가 수렵 ·채취경제에서 곡류(穀類)의 재배, 가축사육에 성공하여 농업사회로 이행한 문명사의 획기적 사건을 신석기혁명 또는 농업혁명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으나, 영국사에서는 중세적인 개방경지제(開放耕地制) 대신에 18세기의 인클로저 운동과 농업기술의 진보, 농업경영의 근대화를 총칭하여 농업혁명이라고 한다. 특히 18세기 후반, 급속한 인구의 증가에 따라서 소맥가격(小麥價格)이 등귀하고 도시에서는 육류(肉類)의 수요가 증대하였으며, 또 1793년 이후 영 ·프 전쟁에 의한 곡물수입의 두절로 농업이윤이 현저하게 상승하자 농업혁명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특히 인클로저 운동에 있어서도 제1차 인클로저 운동 때 정부가 반대한 것과는 달리, 식량증산이라는 국민적 요구 때문에 정부 ·의회는 이를 지원하여 인클로저 운동은 의회의 개별법에 따라서 대규모로 행하여졌다. 이리하여 이 시기에 영국 전면적의 20 %에 울타리가 쳐졌다. 이렇게 해서 농업경영의 중심은 수백 ac(에이커)를 보유하는 부유한 차지농업자본가(借地農業資本家)의 손으로 옮겨져 농민보유지의 집중은 식부면적(植付面積)의 증가를 가져왔고 토지이용 ·배수(排水) ·작물재배의 개량을 가능하게 하였다.

17세기에 이미 순무 ·클로버 등의 사료작물(飼料作物)이 대륙으로부터 도입되어 실험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18세기에 접어들자, 가축사육 ·돌려짓기[輪作] ·시비(施肥:거름주기)가 과학적 ·합리적으로 결합된 4종 돌려짓기 제도, 즉 소맥 ·순무 ·대맥 ·클로버의 돌려짓기가 진보적 지주에 의하여 널리 채용되었다. 이 새로운 돌려짓기에 의하여 휴경지(休耕地)가 없어지고 토지를 겨울에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사료작물의 재배증가로 가축의 증산이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비료증산에 의하여 농업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하였다.

이러한 농업체제의 근대화 위에서 농업기술의 진보에 공헌한 사람으로는 J.털, V.타운센드 등이 유명하였다. 또한, 종래의 양(羊)은 주로 식육(食肉)이 아닌 양모(羊毛)를 위한 사육이었고, 소도 우유와 운반용을 위하여 사육된 것이었으나 18세기 중엽에 R.베이크웰의 가축의 품종개량(品種改良)으로 식육생산이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이러한 신농법의 보급과 더불어 인클로저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중세 이래의 삼포식(三圃式) ·개방경지제도가 폐기됨에 따라 농업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때 낡은 전통적 농법 대신에 신농법의 확립, 대농경영(大農經營)의 보급에 큰 공헌을 한 것은 A.영이었다. 이리하여 영국의 농업혁명은 증대하는 도시인구를 위한 식량공급을 가능하게 하였고 농업소득의 상승이 국내시장의 확대, 유효수요(有效需要)의 증가를 가져옴으로써 농업부문에서 공업에 필요한 노동력과 자본을 공급하게 되었고, 산업혁명의 진행을 원활하게 하였다. 이에 지주 ·차지농업자본가 ·농업노동자의 삼분제(三分制)가 성립되고 농업자본주의가 확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