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택

김춘택

[ 金春澤 ]

요약 조선 후기의 문인. 숙종 때 폐비복위운동을 벌이는 등 당쟁(黨爭)에서 서인 노론을 대표하는 인물로 활동하였으며, 그 때문에 제주 등지에서 오랜 기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출생-사망 1670 ~ 1717
본관 광산
백우
북헌
시호 충문
주요저서 《북헌집》《만필》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字)는 백우(伯雨), 호는 북헌(北軒)이다. 예학(禮學)의 태두인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직계 후손으로 서인(西人) 노론(老論)의 중심 가문 출신이다. 평생 과거를 보지 않고 관직에도 오르지 않았으나, 고종 때인 1888년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의 건의로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追贈)되었으며, 충문(忠文)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할아버지인 김만기(金萬基, 1633~1687)는 송시열(宋時烈)의 문인(門人)으로 딸이 숙종(肅宗)의 초비(初妃)인 인경왕후(仁敬王后)가 되어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그는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 당시 훈련대장으로 남인(南人)의 축출에 앞장섰으며,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등의 역모를 막은 공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이 되었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쓴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김만기(金萬基)의 동생으로 김춘택(金春澤)에게 작은할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인 김진구(金鎭龜, 1651~1704)는 호조판서(戶曹判書),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 등을 역임하였다.

이처럼 김춘택은 서인 노론의 중심인 훈척(勳戚) 가문 출신으로 경신환국 이후 더욱 대립이 심해진 당쟁(黨爭)의 중심에 있었다. 때문에 그는 일생 동안 세 번이나 감옥에 갇히고, 다섯 번이나 유배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김만중(金萬重), 김진구(金鎭龜) 등은 탄핵을 받아 제주 등지로 유배되었으며, 노론계의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폐비되고 남인계의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왕비가 되었다. 김춘택은 세력을 모아 한중혁(韓重爀) 등과 함께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는 한편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려는 폐비복위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1694년 이 사실이 드러나 감옥에 갇혔지만, 숙종이 오히려 민암(閔黯) 등 남인을 파직시키고 남구만(南九萬) 등 서인을 등용하면서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 뒤 서인 내부에서 노론과 소론 사이의 대립이 확대되면서 노론의 핵심 인물인 김춘택은 남인뿐 아니라 소론(少論)에게도 집중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그 결과 1697년(숙종 23년) 김춘택은 금천(金川)으로 유배되었다.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죽은 뒤에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주술(呪術)로 인현왕후(仁顯王后)를 저주했다는 혐의로 사사(賜死)되는, 이른바 ‘무고(巫蠱)의 옥사(獄事)’가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희빈 장씨를 옹호했던 소론 대신들이 몰락하고 노론이 집권하였지만, 장희재(張希載)의 심복인 윤순명(尹順命)이 심문 과정에서 김춘택이 장희재의 아내와 서로 간통(奸通)하였다고 자백하면서 부안(扶安)으로 유배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동생인 김보택(金普澤)이 억울함을 호소하여 유배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1706년 소론 계열의 임부(林溥)가 상소를 통해 1701년 ‘무고(巫蠱)의 옥사(獄事)’ 당시 심문 기록을 적는 문사랑(問事郞)들이 윤순명(尹順命)에 대한 심문 기록에서 ‘모해동궁(謀害東宮)’이라는 네 글자를 빼서 김춘택을 비호했다고 고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 해 6월부터 8월까지 국청을 열어 관련자들을 조사했지만, 이미 윤순명과 장희재가 처형된 뒤여서 분명한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1701년 당시 윤순명의 국문에 참여했던 관리들은 모두 파직되고, 임부(林溥)는 흑산도로, 김춘택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김춘택은 1712년에야 제주도 유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김춘택은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비범했다고 전해지며, 시문(詩文)과 글씨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 김만중(金萬重)이 쓴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한문(漢文)으로 옮겼으며, 제주 유배중인 1708년에 지은 ‘별사미인곡(別思美人曲)’도 전해진다. 79행의 가사 작품인 ‘별사미인곡(別思美人曲)’은 순한글의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다. 경학(經學)에도 밝아 <주자시설(朱子是說)>, <설학강리(說學講理)> 등도 저술했다고 전해진다. 문집으로 20권 7책으로 된 <북헌집(北軒集)>이 있으며, 저서로 <만필(漫筆)>이 있다. 경기도 군포시에 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