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환

김창환

[ 金昌煥 ]

요약 조선 후기 ·한말의 서편제 판소리의 명창이며 판소리 5명창에 속한다. 서편제(西便制)의 창법을 이었다. 《춘향가》, 《흥보가》를 잘 불렀으며, 특히 《제비노정기》 대목에 뛰어났다.
출생-사망 1854 ~ 1927
별칭 명창
국적 조선, 대한민국
활동분야 전통음악, 판소리
출생지 전남 나주

1855년 전라남도 나주(羅州, 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전통적으로 소리를 이어왔으며 김창환은 아버지를 통해 자연스럽게 소리를 접하면서 성장했다. 당시 판소리의 맥을 이어왔던 김창환의 집안은 무가(巫家)로 추측된다. 명창 이날치(李捺致)가 이종사촌 형이며 명창 은방울과는 생질간이다. 그는 소년기부터 이날치에게서 판소리를 배웠다. 이후 전라남도 함평 출신의 명창 정창업(丁昌業)에게 판소리를 배웠으며, 이날치 이후 서편제(西便制)의 창법을 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판소리 이론가로 정평이 나았던 신재효에게서도 사사받았다. 서편제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김창환의 소리는 점차 유명해졌고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는 풍채가 좋고 너름새에 능하여 고종(高宗)의 총애를 받았다. 1902년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칭경예식(稱慶禮式)에 조선을 대표하는 명창으로 발탁되어 노래를 불렀다. 고종은 김창환에게 중추원 의관(議官) 벼슬을 제수하였다. 또한 왕실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만들어지자 주석으로 발탁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협률사에 대한 비판이 일어 폐지되자 1908년(융희1)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극장인 원각사(圓覺社)가 설립되자 주석이 되었다. 그 후 김창환협률사(金昌煥協律社)를 조직하여 각 지방의 명창들을 모았으며 전국 순회공연에 힘썼다. 그는 판소리를 발전시키고 보급하는데도 앞장섰는데 1930년 9월에 조선의 가곡과 음률을 발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음률협회(朝鮮音律協會) 회장을 맡았으며 1932년 1월 조선악정회(朝鮮樂正會)가 설립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대구에서 열린 연주회에 참가하였으며, 소리꾼으로서 활동 이외 판소리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김창환은 국악방송에도 출연하여 노래를 불렀으며, 1915년에는 일본에 지사를 둔 미국 빅터(Victor) 사(社)에서 음반을 취입하였다. 일본음반사 니토(Nitto), 미국계 콜림비아(Columbia), 리갈(Regal) 등의 음반회사에서도 음반을 취입하였다. 소리는 《춘향가》,《흥보가》를 잘 불렀으며, 특히 <제비노정기> 대목에 뛰어났다. 제자 박녹주(朴綠珠)가 그 성음을 이었다. 1937년 타계하였으며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도동에는 김창환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