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일신

권일신

[ 權日身 ]

요약 조선 후기의 학자로 서학을 연구해 천주교를 받아들여 천주교의 전파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직암권일신묘

직암권일신묘

출생-사망 ? ~ 1791
본관 안동
성오
이암
별칭 세례명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활동분야 종교인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성오(省吾), 호는 이암(移菴)이다. 천주교 교명은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이다. 권근(權近)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대군사부(大君師傅)를 지낸 권적(權蹟)이고, 아버지는 권암(權巖)이다. 모친은 풍산 홍씨(豊山洪氏)이고, 성호좌파(星湖左派)를 대표하는 학자인 권철신(權哲身, 1736~1801)은 그의 형이다.

남인(南人) 출신으로 조부인 권적이 인조(仁祖) 때에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 배향을 비판하는 논의를 주도하여 그의 가문은 서인(西人)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모두에게 견제를 받았다. 따라서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문하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했으며, 안정복의 딸인 광주 안씨(廣州安氏)와 결혼했다.

정통 주자학을 비판하며 양명학(陽明學)과 서학(西學) 등에 깊은 관심을 보이던 권철신과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이벽(李蘗), 김원성(金源星), 이윤하(李潤夏) 등 남인 계열의 학자들은 1777년(정조 1)부터 경기도 여주와 광주의 천진암(天眞菴)과 주어사(走魚寺)에서 서학교리연구회(西學敎理硏究會)를 열어 서학을 본격적으로 탐구했고, 그 과정에서 일부는 천주교를 종교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벽의 영향으로 천주교의 교리를 받아들인 권일신은 1784년 베이징에서 예수회의 그라몽(Jean de Grammont, 梁棟材)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李承薰)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전라도의 유항검(柳恒儉)·충청도의 이존창(李存昌) 등에게도 전도를 하여 천주교가 이들 지역에도 퍼지게 되었다.

권일신과 이승훈 등은 명례동(明禮洞)에 있던 역관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며 예배를 보고, 교리서를 한글로 옮겨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외국인 성직자 없이 독자적으로 조선의 천주교회가 시작된 것이지만, 이들의 모임은 1785년 3월 추조(秋曹, 형조)에 발각되었다.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으로 중인 신분인 김범우는 유배형을 받았으나, 양반 신분인 이승훈과 권일신 등은 모두 방면되었다. 그 뒤 권일신과 이승훈 등은 1786년부터 이른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성직제도를 만들어 운영하며 포교 활동을 펼쳤다.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온 이승훈에게 견진성사(堅振聖事)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권일신·최창현(崔昌顯)·유항검(柳恒儉)·이존창(李存昌) 등이 사제로서 각 지역에서 성사를 집전했다.

하지만 평신도가 성사를 집전해서는 안 된다는 교리서의 내용을 근거로 가성직제도에 의문이 제기되자, 권일신은 베이징의 주교인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湯士選)에게 조상 제사와 가성직제도에 관한 교리 해석 등을 부탁하는 편지를 써서 1789년 10월 동지사(冬至使) 일행으로 베이징으로 간 윤유일(尹有一)을 통해 전달했다. 윤유일은 이듬해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되며, 사제 서품을 받지 않은 평신도가 성사를 집전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라는 답변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자 전례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이승훈 등은 천주교를 벗어났지만, 권일신은 윤유일을 다시 베이징으로 보내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하는 등 계속해서 초기 천주교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1791년 윤지충(尹持忠)이 모친의 제사를 거부한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벌어지면서 권일신은 홍낙안(洪樂安)·목만중(睦萬中)의 고발로 교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권일신은 제주도 유배형을 받았으나 노모의 회유로 옥중에서 회오문(悔悟文)을 쓰면서 예산(禮山)으로 유배지가 바뀌었다. 하지만 유배지로 가던 도중에 취조 과정에서 얻은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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