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성직제도

가성직제도

[ 假聖職制度 ]

요약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1786년부터 1790년까지 독자적으로 성직을 임명하기 위해 운영했던 제도.

18세기 후반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문하에서 서학(西學)을 연구하던 남인(南人) 계열의 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점차 종교로서 천주교를 수용했다.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권철신(權哲身)·이벽(李蘗)·김원성(金源星)·이윤하(李潤夏) 등은 1777년(정조 1)부터 천진암(天眞菴)과 주어사(走魚寺)에서 서학교리연구회(西學敎理硏究會)를 구성해 활동했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이벽은 1783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인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로 떠나는 이승훈(李承薰)에게 서학 서적을 구해다 줄 것을 부탁했는데, 이승훈은 베이징[北京]의 북천주당(北天主堂)에서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예수회의 그라몽(Jean de Grammont, 梁棟材)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1784년 3월 천주교 교리에 관한 수십종의 서적과 십자가상, 성화와 묵주 등을 가지고 귀국한 이승훈은 권일신(權日身), 정약용 형제 등을 대상으로 전도를 하며 직접 세례를 집전했다. 이들은 명례동(明禮洞)에 있던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며 예배를 보고, 교리서를 한글로 옮겨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이들의 모임은 1785년 3월 추조(秋曹, 형조)에 발각되어 처벌되었다. 양반인 이벽과 이승훈 등은 모두 방면되었으나 집회 장소를 제공한 김범우는 유배형을 받았다.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이 일어난 뒤에 이승훈과 권일신 등은 포교 활동을 위해 교회의 제도를 갖출 필요가 있다고 보고 1786년부터 독자적인 성직제도를 만들어 운영했다. 이를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한다. 이들은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온 이승훈에게 견진성사(堅振聖事)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권일신·최창현(崔昌顯)·유항검(柳恒儉)·이존창(李存昌) 등이 신부가 되어 평신도를 대상으로 강론과 미사 등을 담당했다. 이들의 신분은 권일신과 이승훈과 같은 양반부터 역관이던 최창현과 같은 중인, 이존창과 같은 평민까지 다양했으며, 지역도 경기도뿐 아니라 전라도(유항검), 충청도(이존창) 등으로 다양하게 분포해 있었다.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통해 신부로 임명된 이들은 성체성사·고해성사와 같은 성사들과 미사를 집전했다. 하지만 유항검이 《성교절요(聖敎切要)》 등의 교리서에서 사제 서품을 받지 않은 평신도가 성사를 집전하는 것은 독성죄(瀆聖罪)에 해당한다고 언급하고 있는 사실을 들어 가성직제도에 의문을 제기하자, 이승훈과 권일신은 1789년 10월 동지사(冬至使) 일행으로 베이징에 간 윤유일(尹有一)을 통해 베이징의 주교인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湯士選)에게 편지를 보내 자문을 구했다. 이승훈과 권일신은 그 편지에서 조선의 자치적 교회의 존재를 알리고, 조상 제사에 대한 교리 해석 등을 부탁했다. 베이징의 선교회는 조선 천주교인들의 질문에 대해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서는 안되며, 사제 서품을 받지 않은 평신도가 성사를 집전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므로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하라는 답변을 보내왔다.

1790년 봄에 윤유일이 귀국해서 구베아 주교의 답변을 전달하면서 가성직제도는 폐지되었고, 성직으로 임명된 이들은 평신도로 돌아갔다. 가성직제도를 폐지한 뒤에 권일신 등은 윤유일을 다시 베이징으로 보내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했다. 베이징의 선교회는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성직자를 파견하려 했지만, 1791년 윤지충(尹持忠)이 모친의 제사를 거부한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벌어지자 이를 보류하였다. 그러다 1794년이 되어서야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파견했다.

카테고리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