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시

권시

[ 權諰 ]

요약 조선 중기의 학자로 공조좌랑 등 여러 직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송시열과 같은 기호학파로서 예론(禮論)에 밝았으며 문집에 《탄옹집(炭翁集)》이 있다.
출생-사망 1604 ~ 1672
본관 안동(安東)
사성(思誠)
탄옹(炭翁)
활동분야 학문
주요작품 《탄옹집》

본관 안동(安東). 자 사성(思誠). 호 탄옹(炭翁). 좌랑(左郞) 권득기(權得己)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아홉살 때 시를 지었으며 15세에 이기지설과 사칠지변(四七之辯)에 정통하였다. 1636년(인조 l4) 천거로 대군사부(大君師傅), 선릉참봉(宣陵參奉),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49년 효종 즉위 후 특별유시로 공조좌랑(工曹左郞)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가 여러 직을 거쳐 1658년(효종 9) 승지가 되었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한 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윤선도(尹善道)가 예송문제(禮訟問題)로 생명을 걸고 서인(西人)을 공격하는 태도를 보고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에 대립하여 이를 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낙향 도중 광주(廣州)의 선영(先塋) 근처에 머물러 살다가 다시 공주(현재의 대전)로 내려갔고, 1668년 송준길(宋浚吉)의 주청으로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송시열(宋時烈)과 같은 기호학파(畿湖學派)로서 예론(禮論)에 밝았다. 좌찬성(左贊成)이 추증되고, 대전 서구 탄방동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탄옹집(炭翁集)》이 있다.

역참조항목

조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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