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소경

5소경

[ 五小京 ]

요약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685년(신문왕 5)에 새로이 정비한 특수 행정구역. 왕경(王京, 지금의 경주)이 신라 영토의 동쪽 끝에 치우쳐 있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동·서·남·북과 중앙의 방향에 맞추어 설치되었다.

소경(小京)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설치되어 있었다. 일찍이 514년(지증왕 15)에 아시소경(阿尸小京)이 설치되었으며, 557년(진흥왕 18)에는 국원소경(國原小京, 지금의 충주)이, 639년(선덕여왕 8)에는 북소경(北小京, 지금의 강릉)이 설치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직 전국적으로 통일적 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삼국을 통일한 뒤 678년(문무왕 18)에 북원소경(北原小京, 지금의 원주)이, 680년(문무왕 20)에 금관소경(金官小京, 지금의 김해)이 각각 설치되었다. 그리고 685년(신문왕 5)에 서원소경(西原小京, 지금의 청주)과 남원소경(南原小京, 지금의 남원)이 설치되었고, 이와 함께 557년에 설치되었던 국원소경이 중원소경(中原小京)으로 개칭되면서 마침내 5소경으로 정비되었다.

5소경 본문 이미지 1
북원경(원주)남원경(남원)금관경(김해)중원경(충주)서원경(청주)신라발해

5소경은 동·서·남·북과 중앙의 방향에 맞추어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왕경(王京, 지금의 경주)이 신라 영토의 동쪽 끝에 치우쳐 있는 약점을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하였던 것 같다. 그것은 5소경이 설치된 지역이 모두 원래 신라의 영토가 아닌 곳이었다는 점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경에 왕경의 귀족들을 이주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5소경은 지방의 피정복민들을 회유하고 통제하고자 설치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통제가 필요했던 것은 소경에 신라가 정복한 국가의 귀족들을 사민정책(徙民政策)에 의해 강제 이주시켰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중원소경에는 대가야(大伽倻)의 귀족들이, 남원소경에는 고구려의 귀족들을 이주시켰던 것이다. 중원소경의 강수(强首)·우륵(于勒)·김생(金生)이나 남원소경의 고구려인 약사(藥師)·법경(法鏡)같은 승려의 존재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소경의 관할 구역은 작았지만, 그 장관인 사대등의 지위가 주의 장관인 도독과 비슷할 정도로 소경은 중시되었다. 그 결과 소경은 신라에서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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