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회수위설

공의회수위설

[ conciliarism , 公議會首位說 ]

요약 중세 가톨릭교회에서, 공의회의 결의가 교황권(敎皇權)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학설.

공의회우위설이라고도 한다. 구체적으로는 교황의 수위권(首位權)과 주교단, 교황청 중앙집권주의와 보편교회 사이의 분열이 있던 무렵 교회의 위계적(位階的)인 구조를 민주적인 구조로 바꾸려 하였던 움직임을 말한다. 14세기경 교황이 프랑스 아비뇽에 머물게 되고(1309∼1378) 교황직과 교회에 위기가 닥치게 되었다. 즉 교권(敎權)과 제권(帝權)과의 대결에서, 프랑스 황제는 제도로서의 교황직 자체를 상대로 반격을 시도하였다. 교황 반대자들을 집합시켜 교황수위권의 신적기원(神的起源)을 부정하고, 교회의 위계적 질서를 문제삼아 교회 내의 최고권력은 민중(民衆)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교황이나 주교 ·신부도 그리스도로부터 고유한 기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다만 신자단(Congregatio fidelium)의 위촉으로 직무를 집행하는 것일 따름이라고 하였다. 신자단은 일반 공의회로써 대표되므로 최고의 기관은 교회 신자들의 대표기관인 공의회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교회개념은 교황직이 공의회의 순 집행기관일 뿐이며, 따라서 교황을 공의회에 예속시키고 공의회에 대해 복종의 의무를 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의회는 경우에 따라서는 교황을 폐위시킬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이같은 이론은 중세에서 16세기에 이르러 종교개혁을 불러온 직접적인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1431∼47)는 바젤 공의회 이후 공의회수위설을 주장하는 공의회 지상주의자들을 억누르고 교황권을 재확립하였다. 그러나 그 후의 교황들은 반대세력이 다시 소생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공의회 개최를 몹시 기피하였다. 이러한 불안은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긴급한 개혁을 시도하기 위한 공의회가 적시(適時)에 개최되지 못하게 하는 과오를 저지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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