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경왕후

헌경왕후

[ 獻敬王后 ]

요약 조선 정조의 어머니로 《한중록》을 지었다.
출생-사망 1735 ~ 1815
본관 풍산
별칭 혜경궁 홍씨, 의황후
국적 조선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한중록》

본관은 풍산(豐山)이며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도세자(思悼世子)라고도 불리는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빈(嬪)으로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正祖, 재위 1777~1800)의 생모이다. 생전의 존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혜빈(孝康慈禧貞宣徽穆惠嬪)이며 사후의 시호는 헌경(獻敬)이다.

영조 때 영의정 등을 지낸 홍봉한(洪鳳漢)의 차녀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韓山李氏)이다. 조부는 예조판서를 지낸 홍현보(洪鉉輔)이며, 홍낙인(洪樂仁), 홍낙신(洪樂信), 홍낙임(洪樂任), 홍낙륜(洪樂倫) 등의 남형제가 있었다. 1744년(영조 20) 10세의 나이로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의 아들인 장헌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했으며, 1750년(영조 26) 장남인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을 낳았고, 1752년(영조 28) 차남인 정조를 낳았다. 그리고 뒤이어 청연공주(淸衍公主, 1754~1814)와 청선공주(淸璿公主, 1756~1802)를 낳았다.

하지만 맏아들인 의소세손은 3살 만에 죽었으며, 1749년부터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던 남편 장헌세자도 1762년(영조 38)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뒤주에 갇혀 죽었다. 당시 영조는 장헌세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겠다는 명을 내리고 한밤중에 세자빈이던 헌경왕후와 세손인 정조 등을 모두 친정인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했다. 그래서 헌경왕후는 장헌세자가 죽은 뒤에야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762년 7월 12일(음력 윤5월 21일)에 영조는 장헌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에게 왕세자의 호를 회복시켜 주었으며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헌경왕후에게는 혜빈(惠嬪)이라는 존호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헌경왕후의 부친인 홍봉한(洪鳳漢)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였고, 그가 1771년 김귀주(金龜柱) 등의 탄핵을 받아 벼슬을 빼앗기고 도성에서 내쫓겼을 때에도 1년 만에 서용하여 관직을 되찾고 도성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여 헌경왕후를 배려하였다.

1776년 정조는 즉위한 뒤에 혜빈궁(惠嬪宮)의 명칭을 혜경궁(惠慶宮)으로 바꾸었으며, 1783년(정조 7)에는 자희(慈禧)와 효강(孝康)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1795년 회갑을 맞은 헌경왕후는 회고록인 《한중록》을 썼는데, 이 작품은 《인현왕후전》, 《계축일기》와 더불어 궁중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헌경왕후는 1816년 1월 13일(순조 15년 12월 15일)에 사망했으며, 경기도 화성의 융릉(隆陵)에 남편인 장헌세자와 함께 합장되었다. 순조는 그녀에게 ‘헌경(獻敬)’이라는 시호를 부여했으며, 고종 때인 1899년에는 의황후(懿皇后)라는 시호가 부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