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왕

경애왕

[ 景哀王 ]

요약 신라의 제55대 왕(재위 924∼927).
경주 경애왕릉

경주 경애왕릉

출생-사망 ? ~ 927
국적/왕조 신라
재위기간 924년∼927년
본명 박위응(朴魏膺)
시대 남북국시대
활동분야 정치

성은 박(朴), 이름은 위응(魏膺), 시호는 경애(景哀)이다. 신라의 제53대 신덕왕(神德王, 재위 912∼917)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의 딸인 의성왕후(義城王后) 김씨이다. 제54대 경명왕의 동생으로, 신덕왕부터 시작된 신라 하대 3명의 박씨왕(朴氏王) 가운데 하나이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어머니가 자성왕후(資成王后)로 기록되어 있다. 왕비와 자녀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나, 박씨의 세보(世譜) 등에서는 경애왕의 아들인 계림대군(鷄林大君) 박순현(朴舜玄)이 경주 박씨 계림대군파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이에 관한 다른 사료가 존재하지는 않아 경애왕에게 자식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경애왕 본문 이미지 1 


신덕왕 경애왕은 917년(경명왕 1) 형인 경명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 이찬의 직위에 있으면서 상대등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에 김성(金成)에게 상대등의 자리를 넘겼으며, 924년(경명왕 8) 음력 8월에 경명왕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올랐을 때 이미 신라는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정도로 크게 쇠약해져 있었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는 등 고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후백제를 견제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925년(경애왕 2)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북 영천)의 장군 능문(能文)이 고려에 투항하자, 왕건은 고울부가 신라의 수도와 가까운 곳이라며 그를 다시 신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경애왕은 925년 겨울에 고려와 후백제가 서로 인질을 교환하며 화친을 맺자 고려로 사신을 보내 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고려와 화친을 맺은 후백제는 신라를 쳐들어와 20여개의 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고려와 후백제의 화친은 926년 음력 4월에 고려에 인질로 가 있던 견훤의 외조카 진호(眞虎)가 갑자기 죽으면서 깨졌다. 견훤은 인질로 와 있던 왕건의 사촌동생 왕신(王信)을 죽이고 군사를 동원해 웅진(熊津)까지 진격했다. 이렇듯 후백제와 고려가 다시 대립하자 경애왕은 고려로 사신을 보내 후백제와 적극적으로 싸울 것을 요구했으나 고려는 방어만 할 뿐 후백제군과 적극적으로 싸우려 하지 않았다.

927년(경애왕 4) 병부시랑 장분(張芬), 병부낭중 박술홍(朴術洪), 창부원외랑 이충식(李忠式) 등을 사신으로 보내 중국 후당(後唐)의 외교적 지원을 받으려 했다. 《삼국유사》에는 경애왕이 즉위한 924년 음력 2월 19일에 황룡사에서 백고좌(百高座)를 열어 불경을 강론케 했으며 선승(禪僧) 300여명에게 음식을 대접했는데, 이것이 선교(禪敎)에서는 처음으로 백고좌를 연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927년 음력 정월 왕건이 직접 군사를 일으켜 후백제를 공격하자 경애왕은 군사를 보내 그를 도왔다. 고려는 용주(龍州)를 점령하고, 음력 3월에는 근암성(近巖城, 지금의 경북 문경)도 함락시켰다. 그러자 후백제는 음력 9월 대대적으로 반격을 시작해 근암성을 함락시키고 고울부도 점령했다. 경애왕은 고려로 원병을 청해 후백제의 침공을 물리치려 했으나, 견훤은 고려의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기습해 경애왕을 죽였다. 《삼국사기》에는 당시 경애왕이 왕비와 후궁, 친척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베풀며 놀고 있느라 적병이 쳐들어오는지도 몰랐으며, 견훤의 군영으로 잡혀간 뒤에 위협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왕비와 비첩들도 견훤의 부하들에게 능욕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애왕을 죽인 견훤은 헌강왕(憲康王)의 외손자로 경애왕에게는 이종사촌이 되는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이다. 왕위에 오른 경순왕은 경애왕의 시신을 수습해 남산(南山) 해목령(蟹目嶺)에 매장했는데, 오늘날 경주시 배동에 위치한 경주 경애왕릉은 사적 제222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 고분은 해목령과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해목령 가까이에 위치한 사적 제173호의 경주 일성왕릉(逸聖王陵)을 경애왕의 왕릉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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