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쟁

격쟁

[ 擊錚 ]

요약 조선시대에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이 궁궐에 난입하거나 국왕이 거동하는 때를 포착하여 징·꽹과리[錚]·북[鼓]등을 쳐서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자신의 사연을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행위.

명쟁(鳴錚)·명금(鳴金)이라고도 한다. 꽹과리·북을 활용한 것은 이들이 농악에 사용되는 도구로서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에 있던 신문고(申聞鼓) 제도의 뒤를 이어 이용된 것으로, 16세기 중종·명종 연간에 관행적으로 정착되었다. 신문고는 본래 하층민의 여론을 상달(上達)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서울에 거주한 문무관원의 청원(請願)·상소(上訴)의 도구로 이용되어 일반 하층민과 지방민들에게는 별다른 효용을 갖지 못하였고, 그나마 각종 제한이 많아 제대로 민의(民意)를 상달하는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또 조선 전기에는 수령권을 확립한다는 취지 아래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이 강력히 시행되는 등 하층민이 억울한 일이 있어도 그것을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 통로가 막혀 있었다. 이에 하층민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직접 호소할 수 있는 새로운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격쟁·상언(上言) 등을 등장시켰다.

격쟁은 형태별로 크게 궐내격쟁(闕內擊錚)·위내격쟁(衛內擊錚)·위외격쟁(衛外擊錚)으로 구분된다. 궐내격쟁은 직접 대궐에 들어가서 국왕에게 호소한 형태이고, 위내격쟁·위외격쟁은 국왕의 거동시에 행한 것이다. 16,7세기에는 궐내격쟁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위외격쟁이 주로 행해졌다. 이 밖에도 하층민은 국왕의 거동시에 커다란 나뭇가지 끝에다 글자를 크게 써서 국왕의 눈에 뜨이게 하거나, 크게 소리를 질러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주목을 끌거나, 창에 매달리거나 높은 곳에 올라가 호소하는 방법을 쓰기도 하였다. 격쟁은 합법적인 호소 수단으로서 횟수의 제한이 없어서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는데, 1790년(정조 14) 서울에 사는 이안묵(李安默)은 산의 소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3년 동안 7번이나 격쟁을 행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격쟁의 처리는 형조(刑曹)에서 관장하였다. 격쟁 사건이 일어나면 격쟁인이 일단 피의자로 간주되어 형조에서 체포하여 의례적으로 곤장 등을 친 다음, 그에게 억울한 내용을 구두로 진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격쟁인이 진술한 사실은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빠짐 없이 3일 이내에 국왕에게 전달되어야 했다. 신체적 고통이 따름에도 불구하고 구두로서 직접 억울한 일을 구체적으로 진술할 수 있고, 내용이 여과 없이 국왕에게 전달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에, 문자를 모르는 하층민들은 글을 써서 아뢰야 하는 상언에 비해 격쟁을 더 선호하였다. 이에 15세기 후반부터는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도 격쟁이 남발되는 것이 사회문제화되었고, 격쟁인에 대한 처벌문제와 함께 격쟁을 할 수 있는 내용에 제한을 두었다. 구체적으로 형벌이 자신에게 미치는 일, 부자(父子) 관계를 밝히는 일, 적첩(嫡妾)을 가리는 일, 양천(良賤)을 가리는 일 등의 이른바 ‘사건사(四件事)’로 내용에 제한을 두었고, 만일 격쟁의 내용이 무고(誣告)로서 판명될 경우에는 격쟁인에게 곤장 80대를 가하는 처벌법규가 제정되었다.

하지만 처벌법규의 제정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격쟁은 더욱 빈발하였다. 1744년(영조 20)에는 격쟁할 수 있는 내용을 자손이 조상를 위하여,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아우가 형을 위하여, 노비가 주인을 위하여 등의 네 가지로 제한하였다. 제한 이외의 내용 등을 들어 함부로 격쟁하는 것에 대한 처벌규정도 한층 강화하여 취미삼아 함부로 격쟁을 일삼는 자는 전가사변(全家徙邊)에 처하고, 격쟁으로서 관리를 무고한 자는 장(杖) 80을 치고, 거짓으로 격쟁한 자는 장 100에 처하는 등의 중벌을 규정하였다. 심지어 격쟁인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형벌을 가하여 죽이는 경우도 나타났다. 이렇듯 가혹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영조 때 만든 사건사의 규정은 앞 시기의 사건사(四件事)와는 달리 억울한 일을 호소함에 본인이 아닌 대리로서 호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갖은 통제책에도 불구하고 격쟁이 더욱 늘고 남발되는 추세를 보이자, 1771년(영조 47)에는 창덕궁 남쪽에 신문고를 다시 설치하여 격쟁 대신에 민원(民怨)을 수렴하려 하였지만, 별다는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애민(愛民)정책을 적극적으로 내세운 정조대에 들어와 격쟁은 커다란 전기를 맞이하였다. 정조는 하층민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려고 대민접촉을 강화하는 한편, 즉위 직후 위외격쟁을 허용하였고 격쟁할 수 있는 사안의 내용도 이른바 ‘사건사’ 이외의 일반적인 고통까지로 넓혔다. 또 관리가 하층민의 격쟁 건수와 내용을 줄여서 보고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정조의 시책은 관료의 심한 반발을 받았으나, 그 내용이 하층민의 일반적인 애로사항으로 확대됨에 따라 종래의 ‘사건사’ 중심의 개인적이고 가문적인 차원을 벗어나, 점차 백성들이 현실 속에서 겪는 사회경제 전반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격쟁은 ‘민의창달(民意暢達)’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고, 동시에 하층민이 서서히 근대적 민권의식을 깨쳐가는 데 기여하였다.

역참조항목

형조, 등장, 격쟁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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