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

각성

[ 覺性 ]

요약 조선시대의 승려로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승군을 이끌고 활약했으며 남한산성 축조시에도 힘을 보태었다. 이후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이 되어 사고(史庫)를 보호하였다. 저서에 《선원집도중결의(禪源集圖中決疑)》등이 있다.
송광사 벽암당 부도

송광사 벽암당 부도

출생-사망 1575 ~ 1660
벽암(碧巖)
별칭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 자 징원(澄圓)
국적 조선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충북 보은
주요저서 《선원집도중결의(禪源集圖中決疑)》《간화결의(看話決疑)》《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

호 벽암(碧巖). 속성 김(金). 충북 보은(報恩) 출생. 9세에 아버지를 잃자 출가할 뜻을 품고 10세에 화산(華山)에 들어가 설묵(雪默)을 스승으로 공부했고, 14세에 보정(寶晶)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 경전의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때 선수(善修, 1543~1615)가 화산에 들어오자 그의 제자로 속리산·덕유산·가야산·금강산 등 명산에서 수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전(海戰)에 참가하였고, 1612년 스승인 선수가 광승(狂僧)의 무고(誣告)로 화를 입자 그도 감옥에 갇혔으나, 광해군이 친국(親鞫)하다가 그의 위의(威儀)에 감복하여 오히려 하사품을 내려 방면하면서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의 직함을 내렸다. 1615년 스승이 죽자 지리산·태백산 등에 은거하였고, 1624년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그에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의 직위를 주어 승군(僧軍)을 거느리고 성을 쌓는 일을 맡게 하였는데, 3년 후에 완공하자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호를 주었다.

1632년에 구례 화엄사(華嚴寺)를 중수하고, 1635년 병자호란 때 의승(義僧) 3,000명을 규합하여 항마군(降魔軍)이라 칭하고 북상(北上)하던 중 강화가 성립되자 지리산으로 되돌아갔다. 1640년 쌍계사로 옮겨가 절을 수리하고,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이 되어 무주(茂州)의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있으면서 사고(史庫)를 보호하였다.

1641년 6월 해인사에서 머물 때, 조정에서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고자 하였으나 서울로 가던 중 병으로 갈 수 없게 되어 다시 백운산 상선암(上仙庵)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1642년 보개산으로 들어가서 법석(法席)을 베풀었으며 이때 왕자였던 효종은 그를 만나 화엄종지(華嚴宗旨)를 배웠다. 1646년 속리산으로 다시 돌아와 동문(同門)인 고한희언(孤閑熙彦)과 가까이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도담(道談)을 즐기다가, 고한이 화엄사로 돌아가 죽자 그도 화엄사로 들어가 여생을 보내다가 '도업(道業)에 힘써 국은에 보답할 것'과 '사후에 비를 세우지 말 것'을 유언하고 앉은채로 입적하였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수초(守初)·처능(處能)이 있으며, 저서에 《선원집도중결의(禪源集圖中決疑)》(1권) 《간화결의(看話決疑)》(1권)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1권)가 있다. 그는 수행에 통달하였고, 원융무이(圓融無二)한 이념의 한국불교 전통성을 깊이 익혀 정혜쌍수(定慧雙修)·교관겸수(敎觀兼修)를 실천하였으며 무자간화선(無字看話禪)을 크게 중요시하고 화엄사상에도 해박하였다.

참조항목

선수, 수초, 처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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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조선시대. 출처: doop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