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열전>에서 소설 주제로 뽑을 만한 사람이...

<<고려사>> <열전>에서 소설 주제로 뽑을 만한 사람이...

작성일 2009.10.01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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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활동 후원제도를 통해 <지식활동대>로 선발되신 ecips님께 드리는 미션 질문입니다.

 

<<고려사>> <열전>에서 소설 주제로 뽑을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ecips님,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정성스러운 답변 부탁합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 고려사 & 열전?

 『고려사』는 약 60년에 걸쳐 편찬되고 수정되어 완성된 고려시대의 역사서입니다. 『고려왕조실록』이 유실되고 없는 상황에서 현존 고려시대 역사의 기본자료이며, 몇 안되는 우리나라의 정사(正史)입니다. 고려사는 중국 『원사』의 영향을 받아 형식이 유사하며, 부분적으로는 『송사』를 참조한 흔적도 보입니다.

  내부의 구조를 잠시 보자면, 고려의 역대왕들에 대한 기록은 「세가」에 담고 있으며, 제도 및 천문지리에 대한 것은 「지」에 담겨져 있습니다. 「표」는 연표이며, 「열전」은 후비전(后妃傳) 2권, 종실전(宗室傳) 2권, 제신전(諸臣傳) 29권, 양리전(良吏傳) 1권, 충의전·효우전·열녀전·방기전(方技傳)·환자전(宦者傳)·혹리전 (酷吏傳) 1권, 폐행전(嬖幸傳) 2권, 간신전 2권, 반역전(叛逆傳) 11권의 총 50권으로서 구성되어 있어, 『고려사』 총 139권의 3분의 1이 약간 넘습니다.

 『고려사』 전체를 웹으로도 볼 수 있는데요, 아직까지 무료공개는 되지 않고 있습니다. (http://www.krpia.co.kr/pcontent/?svcid=KR&proid=1) 단, 대학생인 경우에는 대학 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 대부분 위의 누리미디어 홈페이지가 연결되어 무료로 활용될 수 있으니 이를 통해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 외 출판으로 되어 있는 것은 1960년대 북한에서 번역되어 나온 『북역 고려사』와 국내 동아대학교에서 번역한 『국역 고려사』의 2종류가 있습니다. 물론 한문본은 이보다 더 많습니다. 참고로 위의 누리미디어는 『북역 고려사』를 웹으로 전환시킨 것입니다.

 

  간단하게 동아시아의 역서서술 방식인 기전체(紀傳體)와 편년체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출발한 기전체는 황제에 대한 본기(本紀)와 그 외 사람들의 기록인 열전(列傳)에서 한자씩 취해 기전체하고 부릅니다. 이후 중국 정사(正史)에서는 기전체가 보편적인 체계가 되었습니다. 편년체(編年體)는 말 그대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난 사건을 기술하는 것인데요,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절요』 등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고려사』는 기전체 형식이구요, 아마 조선초기까지는 “고려왕조실록”도 존재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고려사』의 기록에서도 왕대별 『실록』을 편찬했다는 기록도 있고, 조선초기 기록물에도 이와 같은 정황이 나타나기 때문이지요. “고려왕조실록”도 남아 있었다면 고려시기 역사가 좀 더 세밀하고 알찼을텐데 아쉽기 그지 없는 부분이지요.

 

 「열전」에 대한 부분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열전에는 선발된 사람이 특별한 업적이 없으면 부자(父子)를 같은 전(傳)에 합쳐 싣고 있으며,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도 같이 싣고 있습니다. 뒤에 기술하는 귀화인들이 한 전에 여러 명이 실리는 것도 같은 사례입니다. 「열전」의 가장 큰 특징은, 우왕과 창왕이 왕대별 기록인 「세가」에 실리지 않고 「열전」에 실린 것입니다. 이는 짐작하다시피 우왕·창왕은 역적인 신돈(辛旽)의 자손이므로 이들의 16년간의 역사는 『한서』 「왕망전(王莽傳)」의 예에 따라 열전에 써서 역적을 토죄하는 뜻을 밝힌다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 데요, 좀 가혹하긴 합니다.

  열전에는 770인이 선발되어 실렸고, 다시 238인이 추가 기재되어 총 1,008인의 기록이 되었습니다만, 후비전 같은 경우는 거의 출신지역과 아버지 이름만 기재되어 여성사 연구자들에겐 거의 필요없는 텍스트가 되어버렸습니다.

 

2. 인물의 취사선택 기준

  위에서도 약술했듯이 1,008인의 사람 중에서 일단 많이 알려진 인물들은 배제하고자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굳이 제가 답변을 달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한번 알려드렸지만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에 가시면 인물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려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람들은 누가 있을까요?

고등학교 & 중학교 국사교과서

권순형 편역 『고려사열전』

한충희 역 『고려사 열전』

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정성희, 『인물로 읽는 고려사』

각훈

강감찬

강감찬

강감찬

개국공신4인방

강감찬

권력에 굴하지 않은 청백리들

강윤충

강조

견휜

강조

김부식

강조

공민왕

경종

견훤

묘청

강호문의 처 문씨

광종

공민왕과 신돈

궁예

방술과 기예의 일인자들

기철

균여

광종과 쌍기

기철

세계 최강 몽고군에 맞선 사람들

김부식

김부식

궁예

김보당

신돈

김위제

김윤후

김보당과 조위총

김부식

쌍기

김윤후

묘청

덕종과 정종

김사미, 효심

안향

김준

문종

목종과 강조

김윤후

왕규

김천

배중손

묘청과 김부식

만적

윤관

김취려

서희

문종과 대각국사 의천

망이, 망소이

의천

묘청

성종

반기를 든 민초들

묘청

이규보

문극겸

안향

서희

박서

이의민

배중손

양규

성종과 최승로

보우

정몽주

서희

왕건

순종과 선종

서희

정중부

설경성

윤관

양규와 강감찬

신돈

조인규

신돈

의천

우왕과 이성계

쌍기

죽음으로 의리를 지킨 열녀들

신숙

이규보

윤관과 예종

안향

최승로

심우경

이자겸

의종과 정중부

양규

최충

안향

이자연

이의민과 최충헌

윤관

태조의 후비들

염승익

이제현

인종과 이자겸

의천

헌애왕태후 황보씨

오윤부

일연

정종과 왕식렴

이규보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윤관

정몽주

최이와 최항

이의민

효도와 우애를 실천한 사람들

의천

정중부

최충과 이자연

이의방

 

이색

지눌

충렬왕과 충선왕

이자겸

 

이승휴

최영

충숙왕과 충혜왕

이제현

 

이영

최충

태조왕건

정몽주

 

이자겸

최충헌

태조왕건의 여인들

정세운

 

이제현

 

태조의 조상

이방실

 

이존오

 

헌종과 숙종

정중부

 

인후

 

현종

정지상

 

정도전

 

혜종과 왕규

조준

 

정몽주

 

환선길과 이흔암

지눌

 

정습명

 

 

척준경

 

정운경

 

 

최무선

 

정의

 

 

최승로

 

정중부

 

 

최영

 

조위총

 

 

최충헌

 

조인규

 

 

 

 

조준

 

 

 

 

최승로

 

 

 

 

최영

 

 

 

 

최충

 

 

 

 

최충헌

 

 

 

 

홍복원

 

 

 

  일단 5권의 책에서 나온 인물들을 가나다순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저 역시 이 5권 중에서 2권 정도만 소장하고 있는 상태라 내용의 유사성까지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일단 대동소이 할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인물명으로 정렬하였지만, 일부 제목이 인명이 아닌 것은 책의 소제목을 변경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열전」 내에서 좀 재미있는 통계를 보자면(시간이 좀더 많았다면 데이터 분석을 상세히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네요)... 조준(『고려사』 권118, 열전31. 이하“118-31”로 표기), 정도전(119-32), 최충헌(129-42), 신돈(132-45)는 1책으로 구현된 만큼 방대한 양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고려사』 「열전」에서 최고의 분량을 차지하는 사람은 애석하게도 우왕입니다. 우왕은 약 15년간이나 재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돈의 자식이라는 『고려사』 찬자(撰者)들의 판단에 따라 「세가」가 아닌 열전, 그것도 반역전에 실려 있는데요. 재위기간이 길고 『고려사』 편찬당시와 시간적으로 짧은 만큼 「열전」 46권부터 마지막 권인 50권까지 총 5권에 걸쳐 실려 있습니다.

  이 때문에 『고려사』를 공부하시는 분들은 공민왕까지는 「세가」에서 보고, 우왕과 창왕은 「열전」에서 본 다음 마지막 공양왕은 다시 「세가」로 이동해야 하는 불편함도 생기게 되었지요. 그에 비해 가장 짧은 수록들은 주로 「열전」 1권, 2권에 실린 후비들인데요. 그중 광주원부인 왕씨 같은 경우 한자로 15자 정도만 기재(廣州院夫人 王氏 廣州人 大匡規之女)되어 있어, 과연 기록할 의미가 있었는지 의문이 들정도입니다.

또한 『고려사』에는 귀화인들의 「열전」도 실려 있는데요. 후비(后妃)를 제외하고는 10여명정도가 실려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귀화인들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시려면(http://hani.co.kr/section-009100030/2005/03/009100030200503211534034.html)를 참조해 보세요. 화산이씨의 경우는 베트남 최초의 독립왕조인 리왕조의 9대 혜종의 숙부였던 이용상이 귀화한 성씨입니다. 한-베트남 관련 역사소설의 키워드를 제공할 인물로서는 매우 적격인듯 하나, 실제 『고려사』에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no

이름

열전내 위치

원국적

비고

1

쌍기

『고려사』 권93, 열전6. (이하 93-6으로 표기)

중국, 후주(後周)

과거를 건의

2

주저

94-7

중국, 송(宋) 온주(溫州)

외교문서 초안등 작성

현종의 거란침입으로 피난시 수행

3

유재

97-10

(한 챕터에 3명이 실려 있음)

중국, 송 천주(泉州)

선종 때 시부에 합격, 문자에 능숙

호종단

중국, 송 복주(福州)

박학다식, 저주를 거는 일에 능숙함

신안지

중국, 송 개봉부(開封府)

의술에 정통. 외교문서 작성

4

설손

112-25

위구르(回鶻). 이른바 색목인. 원나라에서 벼슬함

공민왕이 원 황실에서 숙위때 친분을 쌓음. 후손들은 조선개국에 공을 세움

5

한복

112-25

중국, 원(元)

시문을 잘 지어, 과거 보는 사람이 한복의 글을 베껴 급제하는 경우가 많았음

6

나세

114-27

중국, 원(元)

홍건적 격퇴에 공을 세웠음

7

이두란

116-29

중국

이성계와 의형제인 이지란으로, 『고려사』에는 이두란으로 표기. 아버지는 여진의 천호(千戶)였으나, 남송 악비의 6대손으로 전한다.

8

위초

121-34

중국, 거란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만두속에 넣은 효자

9

인후

123-36

중국, 원(元)

제국대장공주의 겁령구(怯怜口. 집안 일을 하는 사람)로 귀화

10

장순룡

123-36

이슬람인(回回人)

쿠빌라이 때 관리가 되었으나 인후와 같이 고려에 옴

11

왕삼석

124-37

(한 챕터에 여러명이 있으나 3명은 귀화인)

중국, 남만(南蠻)

충숙왕이 원에 숙위때 총애를 얻음

양재

중국, 원 연남(燕南)

충숙왕때 원에서 총애를 얻음. 왕삼석과 같은 시기이나 총애는 왕삼석 사후 얻음

최노성

국적불명. 색목인

상인

 

  그 외 몽골인으로 고려의 왕비가 된 사람으로는 제국 대장공주(충렬왕), 계국 대장공주(충렬왕), 의비(충렬왕), 복국 장공주(충숙왕), 조국 장공주(충숙왕), 경화 공주(충숙왕), 덕녕 공주(충혜왕), 노국 대장공주(공민왕) 등이 있습니다. 충숙왕은 시집온 몽골의 공주들이 일찍 죽어 무려 3명의 몽골공주와 혼인하기도 하였습니다.

 

 

3. 『고려사』 「열전」에서 뽑은 인물

  아래 표와 같이 15명의 인물을 추려봤습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가진 사람들이 몇 명 더 있었는데, 매번 시간을 탓하기 마련이네요.

no

이름

열전내 위치

용도

비고

1

쌍기

93-6

동화

중국 5대 10국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고려로 건너와 광종의 개혁정치(“과거”)를 제안하고 실현함.

2

오연총

96-9

동화

미천한 가문에서 출세하여 윤관과 함께 여진을 정벌함.

3

문극겸

99-12

소설

이름과 같이 겸손함으로 무신정권기에 문신으로써 화를 면한 인물

4

김방경

104-17

소설

고려말 비운의 명장으로 일본을 점령하려한 장군

5

왕후

110-23

소설

고려 말 쓰러져 가는 나라를 위해 개혁을 실천한 정치가

6

이제현

110-23

소설, 영화

고려말의 혼란기에 충선왕을 따라 제국을 여행한 만국시민이 된 인물

7

백문보

112-25

소설, 영화

오늘날 테크노크라트의 원조이며, 무신집안이면서 탁월한 문장가가 되기도 하였으며, 공민왕을 도와 개혁을 주도하고, 우왕을 보위에 올린 인물

8

정운경

121-34,

동화

마치 전래동화처럼 현명한 지혜로 도둑을 잡은 이야기의 주인공

9

군만

121-34,

동화

미천한 신분이지만 효를 다한 광대. 하지만 내용이 너무 간략함

10

정함

122-35

소설

고려 의종의 유모를 처로 삼아 환관정치의 시작을 알린 인물

11

이영

122-35

동화

송에 가서 휘종의 총애를 받은 고려의 화가

12

설경성

122-35

동화, 소설

조선시대에 허준이 있다면 고려시대에는 설경성이 있다.

13

척준경

127-40

소설

이자겸의 나라에서 왕씨의 나라로 권력의 향배를 바꾸었지만, 그 역시 사라져야 했던 무장

14

조일신

131-44

소설, 영화

공민왕 1년에 발생한 친원파 제거를 위한 친위 쿠테타의 희생양

15

연쌍비

없음

동화, 소설

기녀에서 궁주(후궁)가 된 여인. 우왕 이 위화도회군으로 축출되자 강화도까지 따라감.

 

 

3.1. 쌍기

  쌍기는 알다시피 후주(後周)에서 건너온 중국인으로, 광종의 개혁을 지원한 인물입니다. 광종 7(956)년에 후주의 봉책사(封冊使) 설문우(薛文遇)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병이 나 머물게 되었습니다. 설문우라는 이름은 또한 위 리스트 12번의 설경성의 아들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광종 때 과거제도를 건의하고 그 시험관인 지공거(知貢擧)가 되었습니다. 중국 5대 10국의 난세의 마지막 왕조인 주(周)는 2대 세종 때 권력을 집중하고 통일사업을 진행하였으나 세종이 죽자, 그의 부장(部將)인 조광윤이 무신들의 추대를 받고 세운 나라가 송(宋, 960년 건국. 979년 중국통일)입니다.

  당(唐) 멸망 후 70년 동안 여러 나라가 난립했던 시대가 바로 5대 10국입니다. 907년부터 979년까지 중국은 혼란기에 빠졌지만 이 기간 고려는 착실한 성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생각보다 많은 중국인들이 고려에 귀화하였고 그들 대부분은 문한직(文翰職, 글을 짓는 일로 한문에 대한 이해도가 웬만큼 높지 않으면 글을 쓰기 어려웠으므로 한문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음)에 있으면서 고려의 집권자들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쌍기와 관련되어서는 사실 『고려사』의 기록이 그리 상세하지 않은 만큼 허구가 끼어들 공간이 매우 높습니다. 광종 사후, 광종의 맏아들인 경종에 의해 이루어진 합법적 복수극이 매칭가능한 요소이며, 또한 중국 5대 10국의 혼란이라는 것도 훌륭한 역사적 팩트가 될 수 있을 듯 합니다.

  고려 전기의 실록이 거란 침입 때 소실되어 역사기록이 간략해져 버려 쌍기에 관련된 것도 많이 소실되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TV 『천추태후』에서도 보였듯이 호족세력, 신라 6두품세력과 쌍기 등을 위시한 고려 초기의 중국 귀화세력 등을 믹스하면 훌륭한 소재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박성규, 「고려전기(高麗前期) 중국문학(中國文學)과의 교섭양상(交涉樣相) 연구(硏究)」, 『한자한문교육』 제19집, 2007.

권혁진, 「고려전기에서 중국 문명 수용과 귀화한인(歸化漢人)의 역할」, 『중국문학연구』 32, 박옥걸, 「고려의 귀화인 동화책 - 특히 거주지와 귀화 성씨의 관향을 중심으로」, 『강원사학』 17․18, 2002.

 

 

3.2. 오연총

  오연총은 대부분 윤관과 관련되어서 그 이름이 많이 알려져 있는 케이스입니다. 그는 윤관과 더불어 북방개척에 힘을 썼으며, 송에 가서 『태평어람』 1,000권을 구해오기도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들이 책의 외부반출을 극히 꺼렸는데도 백방으로 뛰어 다닌 점 또한 좋은 소재입니다. 오연총은 집안이 매우 어려웠는데도 공부에 힘써 과거에 급제한 사람입니다. 1107년에는 윤관과 함께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은 후 개선하였으나, 1109년 길주성을 포위한 여진을 치다가 실패하게 되었고 이를 기화로 재상 최홍사(崔弘嗣) 등에게 탄핵되어 관직과 공신의 자격을 박탈당하게 됩니다.

  오연총과 더불어 유의 깊게 봐야 할 사람은 윤관이 아니라 최홍사입니다. 이 양반은 호족이나 문벌귀족이 아닌 평민으로 입신(立身)해 재상의 반열에 오른 인물입니다. 대단히 입지전적인 것이죠. 하지만 오연총 탄핵에서 보듯이 역사에서는 너무 강직해서 편협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오연총과 관련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집안이 어려운 점과, 해주(황해도) 출신으로 북방민족과의 잦은 마찰이 있었던 부분(실제로 그랬는지는 미상), 윤관을 따라 여진족을 정벌하던 부분들이 어린이용 동화로 쓰기에 적합할 것으로 보여집니다.

 

 

3.3. 문극겸

  고려를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 역사적인 사건은 무신의 난입니다. 1170년 일어난 이 사건은 본질적으로 고려의 내재질서를 뒤흔들게 되는데요. 역사가 디지털이지 않기 때문에 무신의 난은 고려 전기부터 눈에 보이게(아날로그?) 누적되어온 사회문제가 무신이라는 분출구를 통해서 나왔을 뿐입니다. 사건을 세세히 보자면, 누구라도 그 시기 그 위치의 무신이었다면 칼을 뽑아들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난이 발발하자 무신들은 문신들의 복장을 보이는 자들은 이유불문하고 칼질을 해 대었습니다.

  문신 중 몇몇은 무신들의 복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문극겸도 그중 한명입니다. 평소 직언(直言)으로 인해 좌천을 겪었던 문극겸은 난 발발 후 병사에 붙잡혔으나 무장들이 그를 죽이지 않고 옥에 가두기만 하였습니다. 외교가인 서희의 후손인 서공(徐恭)도 고위직에 있었음에도 평소의 덕망으로 목숨을 건진 경우입니다. 서공은 평소 문신들의 오만방자함을 비판하고 무인들을 예우했기 때문에 정중부는 직접 순검군 22명을 보내 서공의 집을 호위하여 복수극의 칼날을 비켜가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문극겸의 「열전」에 나온 일화는 약간 인위적이기도 하다. 일단 일화를 좀 보자면.

 

정중부 난에 문극겸이 성(省)에서 수직하고 있었다. 사변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쳐 숨었더니 어떤 병정이 발자국을 따라 그를 체포하였는데 문극겸이 말하기를

“나는 전 정언(正言) 문극겸이다. 왕이 만약 내 말을 들었던들 어찌 오늘의 이 지경까지 되었겠느냐? 잘 드는 칼로 단번에 죽여 주기를 원한다”라고 하니 그 병정이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여러 장군들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여러 장군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우리가 전부터 듣던 이름이다. 죽이지 말라!”고 지시하고 궁성에 가두어 두었다. 의종이 남방으로 가면서 마상에서 한탄하기를

“내가 진작 문극겸의 말을 들었던들 어찌 이처럼 욕을 당하겠는가?”라고 하였다.

- 『고려사』 권99, 열전 12, 문극겸 조.

 

  당시 문극겸은 무신의 난에 핵심멤버인 이의방과 사돈관계였습니다. 이의방의 동생에게 딸을 시집보낸 거죠. 문극겸은 이의방과의 사돈관계로 인해 아비규환을 빠져 나올 수 있었고 무신정권 내내 승승장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 판단할 수도 있지만, 무신란 이전의 그가 보여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자면 무신들에게 정권인수의 연착륙을 도와줄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환관 (白善淵)과 술인(術人. 주술을 부리는 사람으로 치료, 저주 등을 했다고 합니다.) 영의(榮儀) 등을 탄핵하다가 좌천되는 등 직언을 한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직언을 하는 관료가 정권에 핵심에 있다는 것은 도덕성에서 많은 상승작용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문극겸은 문신이면서도 무신의 난 이후 상장군을 겸직하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나름 전쟁수행과 치안을 위해서만 훈련되었던 무신이었던 만큼 통치를 위해서는 문신이 필요했지요. 이런 요구 때문에 기존 문신 중 무신에 호의적이었던 인물(서공)이나, 문신정권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을 했던 인물(문극겸)들은 무신정권에서도 계속 그 지위를 유지하거나 승차하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극겸은 과거에 몇 번 떨어지고, 직언을 하다 지방으로 좌천되기는 했지만 추가적인 굴곡(에피소드)을 찾기가 어려워 장편물로 재탄생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편입니다.

 

 

3.4. 김방경

  김방경은 몽골침입기의 무장이자 정치가입니다. 몽골 침입시에는 섬이 들어가 몽골군과 대치하였고, 몽골과의 화친이 성립되자 삼별초가 일어난 난을 진압하였습니다. 이때 무고(誣告)로 인해 개경에 압송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비슷하죠 ^^;;; 하지만 곧 석방되어 상장군에 제수되어 반란군 토벌에 진력합니다.

  1274년 제1차 일본원정에 도원수 홀돈(忽敦)의 지휘아래 참전하여 대마도와 이키도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합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심한 풍랑으로 본토진입에는 실패하고 돌아오죠. 1277년 모함을 받아 2차 투옥이 됩니다. 이때는 가혹한 고문을 당하지만 끝까지 거짓 자백을 하지 않았고 백령도로 유배에 처하게 됩니다. 그 후 원나라로 이송되었지만 충렬왕의 상소로 쿠빌라이가 무죄를 확인함으로써 방면되어 귀국하였습니다. 그 뒤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281년 제2차 일본 정벌에 주장(主將)으로 참여했으나 또 실패하였습니다.

  조선 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김방경이 일본 정벌을 준비하면서 만든 저수지가 여럿 등장합니다. 이로 보아 김방경은 무장이지만 경세(經世)에도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하여튼, 위의 예로 든 것처럼 이순신 장군에 버금가는 고초를 당하면서도 국가의 부름을 물리치지 않으셨죠. 시각에 따라서는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여 민족자주성의 예봉을 꺾었다고도 볼 수 있으나 당시 몽골의 위세를 감안한다면 삼별초는 애초에 메아리밖에는 될 수 없었습니다.

 

이상철, 「김방경연구」, 청주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86.

민현구, 「몽고군․김방경․삼별초」, 『한국사시민강좌』8, 1991

윤애옥, 「김방경연구」, 성신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3.

류선영,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 활동과 그 성격」, 전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3.

권선우, 「고려 충렬왕대 김방경 무고 산건의 전개와 그 성격」, 『인문과학연구』5, 동아대학교 1999.

박재우, 「김방경」, 『한국사인물열전』, 돌베게, 2003.

김봉석, 『김방경, 일본을 정벌하라』, 시간의 물레, 2006.

장동익, 「김방경(金方慶) 의 생애(生涯)와 행적(行蹟)」, 『퇴계학과 한국문화』 40, 경북대학교, 2007.

 

 

3.5. 왕후

  이름이 약간 여성스러워보이지만, 이 양반 남자입니다. 원래 정승이었던 권보(權溥)의 아들이었지만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불려가 충선왕의 아들로 입적되면서 왕씨성을 하사 받습니다. 특이한 케이스죠. 이후, 원나라와 고려를 왔다갔다 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충선왕은 충렬왕과 쿠빌라이의 딸인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 제국대장공주)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원 황실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몽골은 남녀의 차별이 거의 없었고 때문에 외손자이긴 하지만 쿠빌라이의 직계였던 충선왕은 몽골 황실에서 발언권이 매우 높았습니다. 이 때문인지 충선왕은 고려에서 보낸 시간보다 연경(오늘날 북경)에 머문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사실 비뚤어진 시각으로 보자면 충선왕은 고려의 국왕보다는 쿠빌라이의 손자로서 심양왕의 봉작이 더 맘에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쿠빌라이(세조)의 손자이자 원의 2대황제인 성종(成宗)이 죽자 평소 가까이 지내던 무종(武宗)을 옹림하여 즉위시킴으로써 막강한 정치실력자의 위치를 가지게 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때 반대파에게 정적으로 인식되어 원 인종(仁宗) 사후에는 유배를 가기도 합니다. 충선왕과 이제현의 관계도 매우 유기적이었죠.

왕후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충선왕 사후에는 별다른 사건은 찾기 어렵고 충목왕 즉위년에 원나라에 불려가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하였습니다. 고려 후기 개혁의 상징인 정치도감은 역사서로만 보자면 원 황제의 교지에 의해 설치된 거였습니다. 여기에 깊숙이 관련된 사람이 기황후입니다. 드라마에서 기씨일족이 고려의 재원을 쪽쪽 빨아먹은 흡혈귀로만 나오지만 실은 고려의 재화가 원으로 유입된 것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몽골과의 강화 이후 부마국 시대(충렬왕부터 공민왕 시기로 고려의 국왕은 몽골황제의 사위-부마-가 되는 기간. 이 기간의 임금들이 충자 시호를 받아 ‘충’자와 시대라고 하기도 합니다)에 이런 경우는 허다 합니다. 따라서 근래에는 기황후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기황후나 몽골 황실에서는 고려는 황실의 일원이고, 일본을 방어할 수 있는 울타리이며 동시에 중국본토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인력과 자원을 가진 국가였습니다. 따라서 고려가 정상적인 국가가 되는 것을 강력히 원하고 있었고, 국가기강의 해이와 지배계층의 도덕적 일탈에 대해서 이를 바로 잡을 필요가 절실했습니다.

  아마 『원사』 및 『신원사』에 대한 이해도가 넓어지면 최근 방영되는 『선덕여왕』에 버금가는 소재로 기황후가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기황후는 고려가 일종의 친정인 셈이고 충혜왕때 일어난 일륜의 패륜적 범죄를 처단하고 정치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고려에 정치도감을 설치합니다. 이때 김영돈 및 찬성사 안축(安軸), 판밀직(判密直) 김광철(金光轍)과 함께 판사가 되어 33인의 속관(屬官)으로 하여금 각 도의 토지를 측량케 하고, 불법으로 점유된 토지는 돌려주고, 노비에 대한 신원(伸寃)도 진행합니다. 이 때, 뒤에 나오는 백문보도 정치관(整治官)으로 정치도감에서 임무를 수행합니다.

  하지만, 기황후의 친척인 기삼만이 정치도감에 불려와 조사를 받는 도중 곤장을 맞고 죽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에 정치도감은 해체되고 왕후와 김영돈 등도 체포됩니다. 기황후를 위시한 몽골 황실의 개혁은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던 것이지요. 어쨌든, 기삼만 사건이 해결된 후 몽골의 순제는 정치개혁을 계속해 달라고 왕후에게 주문합니다.

왕후는 공민왕의 즉위를 바라보지는 못하지만, 충목왕 사후 공민왕의 즉위를 위해 많은 애를 쓰게 됩니다. 만약 조금 더 오래살았더라면 왕후-김영돈-이제현-백문보로 이어지는 정상적인 관료군을 형성하여 고려가 회생하였을지도 모르겠네요.

 

 

3.6. 이제현

  이제현은 왕후의 사위입니다. 고려후기는,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맞물려 정신없이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이 역사상에 등장합니다. 여기에 조선 초기에 『고려사』 편찬까지의 시간도 짧은 만큼 기록이 풍부하여 비교적 세밀하기도 하죠. 무슨 말씀인고 하니, 고려 전기와 중기의 기록에 비해 후기의 「열전」은 분량도 많아지고 국제사회(특히 원)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는 만큼 국내 기록인 『고려사』만으로는 사태파악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원사』나 『신원사』등의 자료를 섭렵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의 중간에 이제현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걸 볼수는 없고, 일단 하단에 기록된 참고문헌 중 민현구 교수의 「13~14세기 東아시아世界市民으로서의 李齊賢」을 읽는다면 소설의 팩트를 여러개 건져낼 수 있습니다. 충선왕이 원의 수도인 연경에 “만권당”을 설립하고 학자들을 초빙하였는데 이때 고려측의 인물로서 이제현이 지명되었죠. 이때 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頫) 등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학문과 식견이 넓어졌습니다.

이제현의 소설적 요소로는 세 번에 걸쳐 중국 내륙까지 먼 여행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서촉(西蜀)의 명산 아미산(峨眉山)에 제를 올리기 위해 3개월 동안 그곳을 다녀왔으며, 1319년에는 충선왕이 절강(浙江)의 보타사(寶陀寺)에 강향(降香)하기 위해 행차하는 데 시종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1323년(충숙왕 10)에는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 위로하기 위해 감숙성(甘肅省)의 타사마(朶思麻)에 다녀오게 되는 데요. 이 역시 완성도 높은 시나리오를 위한 필수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이후 충숙왕, 충혜왕 때에는 행적이 부각되지 않다가 충목왕 즉위 후 개혁활동이 진행되면서 다시 전면에 등장합니다. 충목왕이 재위 4년만에 죽자 왕후-이제현 등은 고려의 앞날을 위해 공민왕(왕기)을 추천하였으나 왕위는 충목왕의 이복동생인 충정왕에게 돌아갑니다.

어쨌든 이제현은 공민왕 16년에 죽기전까지 『익재난고 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을 남겼습니다.(흔히 이것을 합해 『익재집』이라고 합니다.)

 

민현구, 「13~14세기 東아시아世界市民으로서의 李齊賢」, 『高麗政治史論』, 고려대학교출판부, 2004.

李淑京, 「李齊賢勢力의 形成과 그 役割」, 『韓國史硏究』제64호, 1989.

오환일, 「麗末 李齊賢의 改革運動」, 『사학연구』 제49호, 1995.

박현규, 「이제현과 원 문사들과의 교류고」, 『대동한문학』 제3집, 1990.

이성근, 「이제현의 중간자적 의식과 시미론」, 『부산한문학연구』 제11집, 1997.

 

 

3.7. 백문보

  백문보는 고려사 열전의 기록보다 오히려 세가(世家)나 다양한 차자(箚子. 상소보다는 격식이 없이 임금에게 올리는 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백문보가 픽션의 소재로 가치있는 이유는 그의 생애의 대부분이 가려져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가 반전(反轉)의 인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백문보에 대한 소재는 저의 개인 블로그에도 상세히 올라와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http://blog.naver.com/ecips/20077520657)

 

백문보에 대한 소재를 정리하자면.

   가. 집안이 한미하였으나 고려말기의 유명한 성리학자인 점

   나. 그의 집안이 무신의 직위를 계승하였음에도 문신이 된 점.

   다. 테크노크라트라고 보여지는 그의 차자들 (대표적인 것으로는 공민왕 시기의 수차-水車 이용을 건의한 점)

   라. 그의 실각과 복권이 신돈과 연관된 점.

   마. 연경(燕京)에서 10여년 동안 있었던 점

등입니다.

 

  백문보에 대한 이야기는 제 블로그에 잡소리에 가까울 만큼 많은 이야기를 써 놓았습니다. 여기서 그 이야기를 또 하게 된다면 중복될 듯 하여 링크를 걸어둡니다. 사실 백문보 만큼 심도깊게 살펴본 인물이 없어서 그럽니다만, 혹 시나리오 작가분이 있으시다면 꼭 백문보로 하나 만드시기 바랍니다. 장편까지는 몰라도 미니시리즈 정도의 분량의 사극은 충분히 커버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민현구, 「백문보 연구」, 『동양학』 17집,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78.

김보경, 「고려후기 주역 인식의 특성과 그 의미 -백문보를 중심으로-」, 『한국학문학연구』32, 한국학문학회.

이종성, 「보인당과 기호유학의 맥락적 관계」, 『동서철학연구』 37, 한국동서철학회, 2005.

이남수, 「백문보의 성리학 수용과 배불론」, 『한국사연구」 74, 한국사연구회, 1991.

김동욱, 「담암 백문보 연구」, 『상명대 논문집』25, 상명여자사범대학, 1990.

 

3.8. 정운경

 『고려사』열전에는 간혹 부제(副題)가 달린 권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들이 간신, 폐행, 양리, 혹리 등입니다. 간신은 다 아실테고, 폐행(嬖幸)은 아첨하는 신하, 양리(良吏)는 어진관리, 혹리(酷吏)는 잔혹한 관리입니다. 정운경은 이중 양리전에 속한 인물입니다. 명석한 두뇌와 그에 어울리는 현명한 판단이 참 멋있는 양반입니다. 정운경전에는 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 목적이 동화책이다 보니 두 번째 챕터가 알맞은 듯 하구요. 이전에 제가 번역 비수무리하게 해 놓은게 있는데 짧으니 읽어보시는게 더 좋을 듯 하네요.

 

州有僧於瓮川驛路 // 주유승어옹천역로 ... 마을(州)에 어떤 승려가 옹천역 길에서

爲賊所捶垂死 // 위적소추수사 ... 도적에게 맞아서(捶) 거의 죽게(垂死) 되었다.

驛吏問其故曰 // 역리문기고왈 ... 옹천역의 관리가 그 이유를 물으니

予持布若干匹行 // 여지포약간필행 ... 내가(승려) 포목 몇필을 가지고 가는데

見餉糞田者又見耘田者 // 견향분전자우견운전자 ... (그때) 거름주는자를 보았고 또 밭 가는자도 보았다.

俄有人自後厲聲曰 // 아유인자후려성왈 .. 갑자기(俄) 어떤 사람이 뒤에서 날카로운 소리로 말하기를

我耘田者呼與語汝何不應 // 아운전자호여어여하부응 ... 나는 밭가는 사람인데, 너를 불렀는데 왜 호응하지 않는 것이냐?

未及對 卽擊之 奪布去 // 미급대즉격지탈포거 .. 미처 대답하지 못하였는데 내리치고(擊) 포목을 가지고 가버렸다.

未幾僧死 // 미기승사 .. 오래지 않아 승려가 죽었다.

吏執耘田者 // 리집운전자 .. 관리가 밭가는 자를 체포하여

告于州鞫之 獄已成 // 고우주국지 옥이성 .. 고을에 고하고 국문하여. 그 죄(獄.. 여기서는 죄란 의미)가 이미 성립되었다.

云敬自外還曰 // 운경자외환왈 .. 정운경이 바깥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殺僧者恐非此人 // 살승자공비차인 .. 승려를 살해한 자는 아마도(恐.. 여기서는 아마도란 뜻) 이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牧使曰 已服矣 // 목사왈 이복의 .. 목사가 말하기를 이미 자복하였다.

曰 愚民不忍鞫訊之苦 // 왈 우민부인국신지고 .. (정운경이) 말하기를 어리석은 백성이 국신(고문)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恐怖失辭耳 // 공포실사이 .. 공포스러워(오늘날에도 쓰는 단어 공포) 말의 실수가 있었을 뿐입니다.

牧使令云敬更鞫之 // 목사령운경경국지 ... 목사가 정운경에게 명하여 다시 국문을을 하게 하였다.

卽召糞田主問曰 // 즉소분전주문왈 .. 즉시 거름주는 자를 불러들여 묻기를

汝餉糞田人時 // 여향분전인시 .. 너는 밭에 거름 줄때에

有言及僧者 毋隱 // 유언급승자무은 ... 승려에 대해 말하는 자가 있었을 것이다. 숨기지 말라

田主曰 // 전주왈 ... 밭주인이 말하기를

有一人言 僧所持布可充酒價 // 유일인언 승소지포가충주가 .. 어떤자가 말하기를 승려가 소지한 포목이 술값으로 충당할 수 있겠다 하였습니다.

於是拘其人 置外 // 어시구기인 치외.. 이때에 그 사람을 잡아다가 외부에 구속시키고

先鞫其妻曰 // 선국기처왈.. 먼저 그 처를 국문하기를

吾聞某月某日 // 오문모월모일.. 내가 듣기에 모월모일에

而夫遺汝布若干何處得之 // 이부유여포약간하처득지 ... 남편이 너에게 포목 약간필을 주었는데 어디서 얻은 것이냐...

妻曰 夫以布歸曰 // 처왈 부이포귀왈 ... 처가 말하기를 남편이 포목을 가져온 날(또는 맡기면서.歸) 말하기를

貸布者還之 // 대포자환지 .. 빌려준 자가 갚은 것이다.

卽詰夫誰貸汝布者 // 즉힐부수대여포자 .. 즉시 남편에게 누구에게 너의 포목을 빌려주었는지 추궁하니

夫辭屈自服 // 부사굴자복 .. 남편은 말이 막히어(屈) 자복하였다.

牧使驚問之云敬曰 // 목사경문지운경왈 .. 목사가 놀라 정운경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凡盜賊秘其迹 // 범도적비기적 ... 대개 도적은 그 자취(迹)를 비밀로 하고 싶어하고

惟畏人知其曰 // 유외인지기왈 .. 오직 사람들이 그것을 알까 두려워 하지요. (그래서) 말하기를

我耘田者 詐也 // 아운전자 사야 .. 나는 밭가는 사람이다라고 사기를 친것입니다.

邑人皆服 // 읍인개복 .. 마을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3.9. 군만

 「열전」에서 특이하게 비슷한 내용을 가진 인물이 2명 있는데요. 그 두사람은 군만과 최누백입니다. 이 두사람은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잡혀먹히자 호랑이를 잡고 그 배를 갈라 시신을 수렴하고 호랑이의 고기를 먹는다는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누백이 기거사인(起居舍人 )을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이 되었지만 군만은 광대출신으로 천민이었습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아마도 군만의 이야기가 최누백으로 전이된 게 아닌가 합니다. 어쨌든 고려시기에는 호환(虎患)이 생각보다 자주 발생하여 이에 대한 효자의 이야기가 「열전」에까지 실리게 된 계기인 것 같습니다. 군만과 최누백의 이야기는 어린이 동화로는 딱 알맞은 구조인듯 합니다.

 

군만은 광대(優人)였다. 공양왕 원년에 그의 부친이 밤중에 범에게 물려갔다. 군만이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고는 활과 화살을 가지고 산으로 들어갔다. 범은 그 부친을 다 먹어 버리고 산모퉁이에서 엎드려 있다가 군만을 보고 으르렁대며 앞으로 와서 먹은 뼈마디를 토해 놓았다. 군만은 그 범을 단번에 쏘아 죽이고 칼을 뽑아 그 배를 가르고 부친의 해골을 추려 모아서 불에 태워 매장하였다.

-『고려사』 권 121, 열전 34, 군만조.

 

3.10. 정함

  정함은 고려시대 환관정치를 잘 나타내주는 인물입니다. 물론 우리나라는 중국에 비해 환관이 정치 전면에 등장하여 권력을 좌지우지 했던 적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만, 정황증거 상 정치개입은 쉽게 유추해낼 수 있습니다. 얼마 전 SBS에서 방영한 『왕과 나』를 보자면 이른 반증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환관에 대한 국내사료는 『삼국사기』 흥덕왕조(896년)에 최초로 발견되는데요. 뭐 그닥 중요한 내용은 아닙니다. 다만, 환관을 뜻하는 내시(內侍)는 고려시기에는 주로 임금의 비서였고, 고자는 아니었습니다. 이후 고려 후기로 넘어오면서 “내시 환관”이 된 첫 번째 인물이 정함이었습니다. 즉, 정함 이전까지 내시는 환관이 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고 일종의 엘리트 코스로 관리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정함은 의종의 유모를 처로 삼았고, 의종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하면서 파격적으로 “내시”에 기용된 것입니다. 이후 고려말기에는 몽골의 영향으로 환관과 공녀(貢女)가 보내지면서 일부 몽골 황실에서 득세한 환관이 고려조정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발생하기도 합니다. 기황후의 내시였던 고용보도 그 중에 한명인데요. 그는 자신의 원찰(願刹. 일종의 개인 사찰)을 만들기 위해 고려재정을 축내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공민왕의 척결대상 리스트에 고용보가 비교적 상위랭크를 하게 되죠. 뒤에 나올 조일신의 난 때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 지방에 은거하고 있던 고용보는 공민왕의 특급 암살지시에 처형되고 맙니다.

  사실 공민왕 시대 만큼 소설로 활용할 수 있는 팩트가 많은 시기도 별로 없지요. 저는 백문보에 대한 팩트를 수집하면서, 그간 공민왕의 최대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자제위”와 백문보의 “보인당” 2개를 공민왕의 사설 특무조직으로 설정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보인당이 정보수집과 감찰이 주 목적이라면, 자제위는 왕의 호위 및 실제적인 행동기구로써 말이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고려 의종은 즉위 초기에는 문벌관료들의 세력을 누르고 왕권강화를 위한 조치를 취합니다만, 이미 비대해져 버린 문벌관료와 그 가문들의 방해로 뜻을 이룰 수가 없었고, 그 와중에 정함은 의종이 생각한 대항마로 귀족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아마 전통시대의 통치자들은 이와 비슷한 생각을 많이 하는 듯 합니다. 환관은 고자이므로 원천적으로 후사가 없고, 후사가 없는 경우 권력이나 재물에 대한 탐욕이 일반 관료군에 비해 현저히 떨어질 수 있습니다. 물려줄 자식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내시들은 결혼도 하고, 양자를 들이기도 해서 이 기대는 이뤄지지 않는 “희망”으로 남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정함은 성리학적 사관(史觀)을 가진 『고려사』 편찬자들에게 곱게 보일 리가 없는 인물입니다. 따라서 그의 폐행(嬖幸)은 도드라지고, 왕권강화를 위해 의종에게 행한 충성심은 희석되었습니다. 정함은 무신의 난 직전의 정국을 이해할 수 있는 인물로 재평가 하신다면 훌륭한 팩트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3.11. 이영

  이영은 이녕이라고 쓰기도 합니다. 한자 녕(寧)을 쓰기 때문이기도 하며, 동시에 「열전」에 이영이라는 사람이 두 사람 더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발음상 이영이 좋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영으로 하겠습니다.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가 전기에 안견, 정선, 김홍도 등이 있다면 고려에서는 이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종(仁宗) 때에 추밀사(樞密使) 이자덕(李資德)을 따라서 송나라로 갔더니 휘종(徽宗)이 한림 대조(翰林待詔. 한림대 또는 한림원의 벼슬입니다. 신라시대에는 대개 왕명을 문서로 작성하였습니다만 송나라에서는 황실화가의 업무도 담당했었나 봅니다. ) 왕가훈(王可訓), 진덕지(陳德之), 전종인(田宗仁), 조수종(趙守宗) 등에게 명령하여 이녕에게서 그림을 배우게 했으며 또 이영에게 고려 예성강(禮成江)을 그리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영이 그린 예성강도를 본 송 휘종이 그것을 보고 매우 칭찬하였습니다.

  이영이 소년 시절에 내전 숭반(內殿崇班. 고려시기의 행정기능직의 일종인 남반의 종7품 벼슬로 남반내에서는 최고벼슬입니다.) 이준이(李俊異)에게서 그림을 배웠습니다만, 이준이는 매우 까칠한(?) 성격이어서 후학들에 대한 지도와 칭찬에 매우 인색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이준이도 이영의 산수화를 보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

 「열전」에 실린 또다른 일화로는 이영이 그린 그림을 송 상인이 중국의 진귀한 작품인줄 알고 있었는데, 실제 그린 사람을 가리기가 어려워 그림의 액자를 벗겨보니 뒷면에 서명이 있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영이라는 소재는 그동안 많이 봐왔던 『동의보감』, 『이산』과 유사한점이 있습니다. 엄격한 스승(이준이)이 있다는 점과 능력은 있으나 그를 시기하거나 믿어주려고 하지 않는 점(송나라 상인)등이 그것입니다. 그런 역경을 뚫고 송나라에 직접 가서 그림을 배우고 또한 그의 그림실력을 중국의 황제가 인정했다는 점 등입니다.

하지만, 국내에서 이영에 대한 추가 연구는 매우 드문 편이어서 참고문헌이 없습니다.

 

 

3.12. 설경성

  고려시대에도 허준과 버금가는 명의가 있었습니다. 설경성이라는 사람인데요, 이미 매스컴등에서 몇 번 조명되기도 하였습니다. 설경성은 신라시대 유명한 이두학자인 설총(薛聰)의 후예이며, 대대로 의업에 종사하였습니다. 신라 말기 불교가 들어온 이래, 인도의 의술도 같이 들어와 『고려사』에서 의사는 승려를 제외하고는 매우 찾기가 어려운데, 설경성은 아주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아마 일반인 의사들은 있었으나 사회적으로 천시된 직업이었기 때문에 「열전」에 오르는 영광은 몇몇 소수에게만 부여된 행운이었을 것입니다.

  설경성은 상약의좌(尙藥醫佐)라는 벼슬로 관직을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충렬왕이 병에 걸릴 때마다 설경성이 이를 치료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따라서 관직도 수직상승하여 도첨의사사(都僉議司事)에 이르게 됩니다. 도첨의사사는 고려 최고의 통치기구인 중서문하성이 몽골간섭기에 첨의부(僉議府)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후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로 바뀌었습니다. 도첨의사사를 주재하는 관리라는 것은 곧 재상의 반열이라는 것이지요.

  충렬왕은 쿠빌라이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한 몽골황실의 부마이지요. 말년에 쿠빌라이가 고질병에 시달리자 고려에서도 의원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자, 이에 설경성이 뽑혀 갑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나이차는 무려 23살입니다. 충렬왕이 불혹을 바라보는 38살의 애 딸린 유부남이었지만, 정략적 혼인에 16살의 몽골처녀가 고려로 시집온 것이지요. 여기까지만 보자면 제국대장공주가 불쌍해 보이지만, 이 양반이 고려에서 행한 안하무인적 행동을 보자면 동정심이 싸악 가심니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서요. 쿠빌라이의 병은 당근 설경성이 치료한 덕분에 호전됩니다. 이후에 행운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지요. 설경성에 대한 매스컴 기사를 참조해보세요(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pdf_ReadBody.jsp?ID=2009070400019&srchCol=pdf&srchUrl=pdf1)

  설경성의 팩트는 이전에 다뤄지지 않았던 고려시기의 의학이라는 분야에서 희소성이 매우 높습니다. 더불어 몽골의 쿠빌라이와 충렬왕 등이 등장하기 때문에 시나리오 구성만 잘된다면 『대장금』을 넘어서는 훌륭한 소재가 될 것입니다.

 

 

3.13. 척준경

  고려 중기는 인주(경원)이씨의 세상이었습니다. 대대로 왕실과 사돈을 맺었고, 윗대부터 일궈낸 권력은 이자겸에 이르면 그 권세는 왕권을 능가하게 됩니다. 송의 사신으로 왔다가 『고려도경』을 지은 서긍에 따르면 이자겸이 왕권찬탈음모를 막아내었고, 어진 이를 좋아하며 권력을 잡았으면서도 왕실을 존중했지만, 이득을 쫓고 넓은 땅을 소유하여 사람들이 추하게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자의 칭찬은 아마도 고려조정에서 친 이자겸 관료들에게 얻은 사실일테고, 후자는 저자거리의 소문을 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이자겸이 왕권찬탈음모를 막아낸 것은 이자겸의 반대세력인 한안인을 역모로 몰아 제거한 사건으로 고려내부의 사정을 잘 모르고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한안인을 제거하기 위해 대방공(帶方公) 왕보(王俌)를 추대한다는 역모를 흘리고 이를 기화로 반대파를 제거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지요.

  말이 좀 길었습니다만, 11세기의 이자겸 세상을 끝낸 사림이 척준경입니다. 이자겸은 고려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부분이지요. 하지만 척준경에 대해서는 자세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정리하자면 백그라운드의 역사적 사실이 풍부(이자겸 일가의 이야기)하고, 소재의 다양성(척준경의 세부이야기)이 결합된 안정적인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낼 인물이 바로 척준경이라는 사람이죠.

  본격적으로 알아보자면, 척준경의 집안은 향리로 집안이 가난해서 공부를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급관원이 되고자 하였으나 이것도 여의치 않자 동네 노는 총각(?)이 됩니다. 밑바닥인생이라고 볼 수 있죠. 이후 계림공(숙종)의 종자로 있다가 추밀원별가(樞密院別駕)가 되었습니다. 이 나마도 계림공이 정변을 일으켜 숙종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후 숙종 9(1104)년, 동여진 정벌에 참가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진군에 대패를 당하고 계속 패주합니다. 이때 척준경이 기병 100기를 요청하여 적진에 침투하여 적장 2명을 베고 돌아옵니다. 이 공로로 천우위녹사 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로 승진하게 되죠. 이후에도 게임 “삼국무쌍”의 주인공처럼 적진을 돌파해 여러번 군공을 세우게 됩니다. (스펙타클하게 정리해놓으신 분이 계시네요 ^^;;; 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11&dir_id=110101&docid=533020&qb=5qie5a+G6Zmi5Yil6aeV&enc=utf8&pid=fWR1FB331y8ssZM3j3dssv--507372&sid=StUZFHoG1UoAAFTxNng)

 

  이후 중요관직에 있으면서, 이자겸의 난에 동조하여 궁궐에 침입하여 불을 지르고 반대세력들을 참수합니다. 이자겸에게 있어 척준경은 흡사 “여포”와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인종의 밀지를 받고 이자겸을 체포하는 급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척준경 자신은 이자겸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고자 하여 곧 탄핵됩니다. 이후 탄핵과 복권이 연이어 이뤄지면서 최종적으로는 재상의 지위인 문하시랑평장사로 추복(追復 : 빼앗은 위효를 죽은 뒤 다시 회복시켜 줌)시켜 주게 됩니다.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척준경은 이자겸으로 대표되는 고려전기의 문벌귀족사회 자체를 무너뜨린 사람입니다. 문벌귀족사회는 권력을 가진 소수의 문벌귀족이 권력을 독점하고 그룹내의 혼인을 통하여 결속을 다져 이른바 체제를 고착화시켰습니다. 과거를 통해 고위직으로 들어와도 귀족사회내의 통혼이 없으면 그 가문은 문벌귀족사회에 편입되지가 않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자겸의 난을 겪으면서, 이러한 유동적이지 않고 폐쇄적인 사회구조가 갖는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것은 무신의 난으로 연결지어지게 됩니다. 사회경제사적으로는 이후 문벌귀족내의 투쟁으로 고려내의 재화가 재분배 과정이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같은 지배계급이었지만 홀대받고 있었던 무신들의 불만이 기하급수적으로 누적되게 되는 효과도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척준경은 앞서 기술한 오연총과도 동여진 정벌로 연결되어 있는 것도 참고해 볼 만합니다.

 

 

3.14. 조일신

  MBC TV의 드라마 『신돈』을 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조일신과 김용은 공민왕이 연경에 머물때 수종(隨從)한 공신입니다. 그 중 조일신이 선택된 이유는 조일신의 난이라 일컬어지는 공민왕 즉위 초의 급박한 정국흐름 때문입니다.

  조일신의 난의 정황은 대략 이렇습니다. 공민왕 즉위 1년 기철, 고용보등 친원파를 제거하기 위해 거병하였으나, 기철의 동생인 기원(奇轅)만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초조해진 조일신은 공민왕이 거처하던 성입동(星入洞)의 이궁(離宮)을 포위하고 직숙(直宿)을 살해한 뒤에 공민왕을 핍박하여 우정승이 되었습니다. 밤낮을 가려 기철을 잡으려고 했으나 잡지 못하자, 자신의 군사행동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수하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군사행동과의 선을 그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공민왕은 삼사좌사(三司左使) 이인복(李仁復)과 비밀리에 의견을 나눈 후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워놓고 정동행성에 나아가 나이든 대신들과 합의하고 이튿날 김첨수(金添壽)를 시켜 잡아들여 궁문 밖에서 참살시키게 됩니다. 이게 조일신의 난에 대한 『고려사』 「열전」의 기록입니다.

언뜻 읽어보면 말이 됩니다만, 행간을 조금만 살펴보자면 무리수가 엿보입니다. 조일신의 무리수를 설명하는 글 자체가 무리라는 말이죠. 아 물론 이게 논문은 아니니 사료근거를 대라고 하시면 대략 난감하니 그냥 제 생각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생각하는 조일신 난의 논리적 모순점은, 과연 일개 공신(功臣)이었던 조일신이 아무리 선견지명이 있었더라도 기황후의 오빠들을 단독으로 죽이려는게 말이 되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는 틀림없이 왕의 재가가 없이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몽골은 당시 주원장의 한족 반란군에 밀려 힘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 세력이 중국은 물론 고려에까지 미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조일신의 단독 군사행동이었다면, 무력 충돌없이 공민왕에게 순순히 체포가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아울러 『고려사』 「열전」에 기재된 대로 여타 대신들과도 경쟁관계 또는 시기심이 매우 강했던 조일신이라면, 응당 고관대신(대표적으로는 이제현)들도 죽였어야 하는데 이런 기록은 없다는 것도 이상한 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기원에 죽음에 대해 공민왕이 책임이 없다면, 굳이 이듬해 기철의 어머니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설날을 같이 보내야 할 필요성이 있냐는 것입니다. 조일신의 단독범행이었더라도 당시의 사람들이나 기씨 일가는 조일신의 군사행동 자체가 공민왕의 밀지를 받은 계획된 행동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조일신의 난 또는 조일신의 군사행동은 철저히 공민왕과의 연계과정에서 진행되었을 개연성이 농후하며, 『고려사』 「열전」의 조일신의 기록은 공(功)은 공민왕에게 과(過)는 조일신에게 부여하는 듯한 인상이 보입니다.

  또한, 공민왕 5년의 기철 일파를 대대적으로 처형하는 것과 조일신의 군사행동이 일면 똑같다는 정황입니다. 공민왕은 조일신의 군사행동에서 얻은 교훈으로 동시다발적인 군사행동을 일으킵니다. 조일신의 난때 북쪽으로 달아나 생명을 부지했던 기철을 보고, 공민왕은 같은날 기철제거와 쌍성총관부 공격, 정동행성 이문소등을 폐지합니다. 이로 볼때 공민왕과 조일신은 같은 목표로 움직였다고 보여집니다.

밑에 참고논문을 보시면, 고려후기의 정치사 특히 공민왕 관련되어서는 민현구 교수의 논문이 매우 탁월합니다. 앞서도 나온 백문보 관련되어서도 이 분 논문을 많이 읽었는데요. 깊이 있는 창작물을 쓰시려면 꼭 읽고 쓰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閔賢九, 「辛旽의 執權과 그 政治的性格」, 『歷史學報』 38·40, 1968.

閔賢九, 「趙仁規와 그의 家門」, 『震檀學報』 42·43, 1976·1977.

閔賢九, 「高麗 恭愍王의 卽位背景」, 『韓佑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1.

 

 

3.15. 연쌍비

  마지막으로 선택한 인물은 제가 가장 아끼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열전」에 기재되어 있지 않음에도 부득불 설명하고자 하며 아마 여러 가지 다양한 창작물로 나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연쌍비는 우왕(禑王)대의 구비삼옹주 중의 한 사람인 명순옹주입니다. 구비삼옹주(九妃三翁主)는 한자에서도 보이듯 9명의 후비(后妃)와 3명의 옹주입니다. 한마디로 우왕이 많은 수의 처첩을 거느려 재정을 거덜내고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는 의미로 쓰인 겁니다. 사실 이게 보통명사인데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보니 특수명사화된 것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고려시기에는 임금의 딸과 후비등에게 공주, 궁주, 옹주 등이 쓰여졌는데요. 어떤사람에게 딱히 어떤 칭호를 주는지는 명확하지 않은 듯 합니다. 다만, 고려후기에 오자면 몽골의 공주들에게는 “공주”를, 고려인 후비들에게는 궁주나 옹주를 부여하는 것 같습니다. 연쌍비와 관련된 보다 긴 글은 제 블로그에 남겨져 있으니 시간이 더(?) 허락되시는 분들은 가셔서 보십시오(http://blog.naver.com/ecips/20071966422)

  연쌍비는 기녀 출신입니다. 『고려사』의 기록 중 몽골간섭기 이후는 국가기강이 문란하고, 지배계층의 도덕적 해이가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흡사 “국가”라는 외피를 입은 조직폭력배라고나 할까요? ^^;;;

어쨌든 조선시대라면 상상도 못할, 기녀 출신 후비가 탄생합니다(사실 3옹주가 모두 기녀이거나 천민출신입니다). 사실 기녀에 대한 선입견은 사람마다 틀리겠지만, 연쌍비가 그저 그런 인생을 살았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선택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연쌍비를 선택한 이유는, 우왕이 위화도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에 의해 강화도로 쫓겨갈 당시 우왕을 따라나선 2명의 구비삼옹주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명은 최영의 딸이었습니다.

  폐주(廢主)를 따라 유배생활을 한다는 것은 왠만한 용기로는 감히 엄두도 못낼 일이었지요. 더더군다나 이성계가 실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유배지에서 우왕을 따라 죽어야만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볼 때 기녀출신의 연쌍비의 행동은 매우 뜻밖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다른 후비들과는 달리 연쌍비는 임금의 옷을 입고 우왕과 같이 사냥을 가거나 이동할 때 같이 다녔다고 하는 기록입니다. 이 기록만 놓고 보자면 우왕의 경솔함이 왕의 권위를 실추시켰다고 볼 수 있으나, 창작물에서는 연쌍비가 혹 임금의 호위를 담당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확장시켜 볼 수 있겠습니다. 고려말의 뒤숭숭한 분위기라면 언제 임금이 시해되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데, 그런 상황이라면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것이고 이 상황이 앞서 이야기 한 강화도까지 수발을 들러 간 연쌍비라면 자연스레 러브스토리와 연계되어 시너지 효과가 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연쌍비는 『고려사』에 3번, 『고려사절요』에 1번 언급되어 있어 사료가 매우 적습니다만 적은 팩트가 매우 강력한 것이라 이야기의 소재로 활용하기에는 더 없이 좋을 듯 합니다. 더 많은 자료는 앞서 기재한 제 블로그를 참조하시면 원문과 좀 더 많은 해석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4. 맺으며

   이번 글은 맺음말을 안쓰려고 했는데, 너무 고생한터라 몇자 끄적이고 갑니다. 개인적으로 『고려사』 「열전」에서 백문보, 척준경, 연쌍비, 설경성 등의 인물들이 창작물의 소재로 안성 맞춤인듯 합니다. 스토리 구조가 단순한 동화책으로는 나머지 인물들이 좋구요.

 「열전」을 읽으면서, 귀화인 정리하고 맘에 드는 사람들 뽑아내기까지가 무척 힘들었네요. 이 주제 선정하고 나름 틈틈이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시간에 쫓겨 ^^;;;

진짜 마지막으로 글을 남기자면, 혹 이글을 읽고 계신 분이 동화작가를 꿈구는 분이라면 『고려사』 보다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편찬한 『한국구비문학대계』를 읽으시길 추천해 드리구요, 돈 때문에 구매하기 어려우신 분은 같은 기관에서 홈페이지로 만들고 있는 「디지털향토문화대전」의 지역별 사이트의 “구전문학”코너를 읽으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혹 오타 보시면, 밑에 댓글좀 달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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