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의 군사들에 대해....

삼별초의 군사들에 대해....

작성일 2006.04.05댓글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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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군사들에대해...

음..

유명한 장군 즉 위인들의

이름과 삼별초에서 영향을 받은 업적을 알려주세요...

좀 빨리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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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저도 혹시 도움이 될지나 해서 올렸습니다.

많은 도움 됐으면,.. 좋겠습니다...

아~~~! 참고로..... 인쇄하기 쉬우시게 말하는 것처럼이 아니라 설명하 듯 중요한 것만 알려 드리겠습니다.

 

 

 

 

삼별초에 대해

 

삼별초


별초는 원래 경찰 업무와 전투업무를 함께 수행하던 고려의 임시 특별군 이었다. 최우가 집권할 때 야별초를 창설하여 자신을 호위하고 치안을 담당케 했고, 이후 좌별초, 우별초 등도 생겨났다. 고려의 정규군 체제가 흐트러지자 이들 별초군은 몽고군과 치른 전투에서도 맹활약했다. 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와 신의군을 합쳐 부른 말이다. 1270년 몽고와 강화를 맺은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삼별초의 장군들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사람은 보내 삼별초를 해산하려 하자 배중손을 필두로 한 삼별초는 저항을 했다. 이들은 강화도의 무기고를 열어 군졸들을 무장시키고, 승화후 온(溫)을 왕으로 추대해 별도의 정부를 구성했다. 몽고군에 대한 항복을 원치 않던 많은 군사들과 백성들이 이들에 가담했다.그러나 고려와 원의 연합군에 의해 대대적인 진압이 시작되었고 이렇게 전개가 되자 김통정은 70여명의 부하들과 함께 한라산으로 들어가서 목매 자살했고, 이로써 삼별초의 항쟁은 막을 내렸다. 이들의 항쟁은 농민들의 반몽 정서를 바탕으로 가능했다. 1271년 1월에 경상도 밀양과 청도 농민들이 진도의 삼별초 군에 호응하기 위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개경의 관노들이 다루가치와 고려 관리들을 죽이고 진도로 가려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사건 등이 일어났다. 아래에 있는 것은 항쟁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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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처음에 최충헌이 정권을 잡은 후 시작된 야별초는 그의 아들 최우에 와서는 지방까지도 파견하여 도적을 잡는 일도 하게 되니 그 수가 많아져 삼별초를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어졌다.
  고종 18년(1231년)부터 몽고군의 침략을 받게 되었는데 그들과 싸우다가 포로가 된 고려군이 기회를 보아 탈출하여 오자 이들을 별도로 모아 몽고군과 싸우는 데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를 신의군이라 하였고,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을 합하여 삼별초라 하였다. 그러므로 삼별초는 당시 특수정예군이었으며 그 직능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내 치안과 포도, 금폭, 형옥까지 담당하였다.
 둘째, 도성의 수위와 최씨 정권의 친위대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세째, 몽고와의 전쟁시 전위대 역할을 담당하였다.
끝-->
 삼별초의 난  

 고종은 태자를 목고로 보낸 다음 6월에 돌아가셨으므로 임시로 왕손이 국정을 보다가 이듬해 3월에 태자가 귀국하여 등극하니 이가 원종이다.
 이 때, 몽고에서는 헌종이 죽고 세조가 즉위하였다. 원종은 세조와도 간 때에 접촉이 있었으므로 왕족 희를 축하사절로 보내니 세조도 고려에 대해서는 관용하였다.
 한편 최우는 고종 36년(1249년)에 죽고 그의 아들 최항이 뒤를 이었는데 그도 44년(1257년)에 죽으니 그의 서자 최의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최의는 연소하였으므로 45년(1258년) 3월에 김준에 의하여 제거되었다. 그 후 김준은 원종 9년(1268년) 12월에 임연에게 제거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문신 이장용(등은 몽고와 관계 개선을 주장하는 데 반하여 삼별초 무신들은 항거할 것으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화의론과 항쟁론 틈바구니에서 원종이 화의론으로 기울어지자 임연은 10년(1269년) 6월에 원종을 폐하고 왕제인 창을 옹립하였다. 그러나 이 때 세자 심이 국사로 연경에 가 있었으므로 이 소식을 듣고, 원 세조(에게 아뢰어 임연에게 죄를 사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세조는 고려를 복종시킬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강경하게 압력을 가하여 그 해 11월에 원종을 복위시켰다. 복위한 원종은 동년 12월에 연경에 가서 사례하고, 항구덕인 평화를 위하여 원 왕실과 혼인을 맺는 일과 강화도에서 출륙하여 환도하는 일과 권신을 제거하는 일 등을 약속하고 다음해 2월에 세자 심과 함께 귀국하였다.
 원종은 귀국하자 개성에 머물면서 강화도에 있는 문무백관에게 출륙을 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삼별초 군인들은 곧 불복하여 항몽태세를 취하였다. 원종은 장군 김지저를 강화도로 보내어 삼별초의 혁파를 명하였다. 그러자 삼별초는 무기고를 점거 봉기하여 왕족 승화후 온을 왕으로 받들고 원종을 적으로 돌리니 이를 삼별초의 난이라 한다. 이 때 주동자는 장군 배중손과 지유, 노영희 등이었다.
  삼별초는 원종 11년(1270년) 6월 1일부터 3일 사이에 강권을 발동하여 천여척의 크고 작은 배에 사람과 물자를 싣고 남하하였다.
 개성의 조정에서는 김방경을 추토사로 삼아 군사 60여명으로 몽고의 송만호 천여명과 함께 삼별초를 추격하였다. 삼별초가 영흥도에 정박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김방경이 공격하려 하였으나 송만호가 두려워하며 이를 말리었다. 이리하여 삼별초는 8월에 진도에 도착하여 용장성을 쌓는다.

탐라에 들어온 삼별초 

 고려 조정에서는 진도 공격에 앞서, 삼별초가 진도에서 패전한 후 탐라로 들어가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하여 원종 11년(1270년) 9월에 영암부사 김수에게 방위군 2백명을 주어 탐라를 수비하도록 하였다. 이어 장군 고여림에게도 군대를 주어 탐라수비에 가담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탐라 수빌르 위하여 도민을 동원하여 환해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한편 진도의 삼별초 측에서도 관군이 탐라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별장 이문경에게 명하여 탐라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이문경은 관군보다 2개월뒤인 11월에 명월포로 상륙하였다. 김수는 관군을 거느리고 이를 막고자 출전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대촌으로 후퇴하였다. 
 이문경은 추격하여 대촌에 육박하였으나 성주 고인단은 성을 굳게 닫았다.  그러자 이문경은 대촌성을 우회하여 동제원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관군인 김유성·진자화·등이 용맹하게 싸워서 삼별초인 곽연수·이열 등을 사살하였다. 이문경은 관군을 송담천으로 유인하여 복병술로 반격하니 고여림도 불의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고 관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이문경은 명월포에서 조천포까지 교두보를 확보하고 탐라를 지배하였다.
 원종 12년(1271년) 5월 15일에 용장성이 함락되니 김통정 장군이 진도를 탈출한 사병들을 거느리고 앞서 이문경 별장이 장악한 탐라에 들어와서 후일의 재기를 다짐하였다. 이때 남해현에 있던 별장 유존혁도 병선 80척을 이끌고 와서 합세하였으므로 삼별초로서는 사지환생하는 기세였다.
 김통정이 한라산 북쪽 귀일촌에 외성은 토성을 쌓고 내성은 석축하니 이게 항파두성이다. 이 외에 애월포에는 목성을 쌓고 하귀포를 군항으로 삼았다.
 성의 규모는 외성 토성은 둘레가 15리나 되며 성내에는 백성들을 살게 했고 석축한 내성에는 관아를 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대는 높고 동서로 하천이 있어서 천연적 요새를 이룬다. 또 성 밑에 수량이 풍부하여 언제나 흐르는 구시물과 옹달샘이 있었으므로 이곳에 자리잡은 것으로 생각된다.
 토성이 완성된 후에는 민가에서 재를 거두어 성 위에 살포하였다가 적의 침공이 있을 때는 말을 그 위로 달리게 하였는데, 말꼬리에 대비를 달았으므로 회진이 충천하여 연막을 편 것처럼 성의 모습이 감추어졌다고 전한다.
 김통정은 탐라에 들어와서 항파두성을 축조하는 한편 진용을 정비하여 본토 공격에 나섰다.
 원종 13년(1272년) 3월에 회령을 엄습하여 조선 4척을 빼앗았다. 동년 5월에 대포를 침공하여 선박 13척을 빼앗고 탐진도 공격하였다. 이때 경상도에 정찰 나갔던 삼별초 2명이 경상도 안찰사에게 잡혔다.
 동년 6월에 전라도 지휘사가 아뢰기를 '삼별초의 전선 6척이 안행량을 거쳐 북상합니다' 하니 송경의 인심이 흉흉하였다.
 이 때 노효재라는 자가 역적에 붙었다가 14일에 도망와서 말하는데, 역적은 390명이 11척에 나누어 타고 경상도·전라도의 공미조선을 빼앗고자 연안 포구를 공격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장차 전라도의 전선 조선소를 침공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리고 작년 9월에 탐라에서 고윤대 등 6명이 김방경 휘하에 귀순하였는데 흔도가 여러차례 불러서 군중에 억류하였으니 탐라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어찌하겠습니까. 지금 귀순을 시키려고 힘을 쓰는 판인데 그러한 일이 없도록 하소서.
 또 우리나라 군인은 일찍부터 활과 갑옷을 다 회수당하여서 군인이라 할지라도 맨주먹과 알몸이나 다름 없으니 매우 불리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위는 어리석은 자를 먼저 치는 것이며, 덕은 살아있는 자를 굳건히 함을 숭상하는 것이니 경상도 관군 2천명과 전라도 기사 수백명을 나누어 주시면 조선소를 지킬 뿐 아니라 연해를 방어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동년 8월에 전라도 공미 8백 석을 빼앗았다. 동년 9월에는 고란도를 엄습하여 전선 6척을 불사르고 조선공을 죽였으며, 조선관 홍주 부사 이행검과 결성 남포의 감무를 납치하였다.
 동년 11월에 안남 도호부를 엄습하여 지난날 김방경과 같이 진도를 공격하였던 부사 공유의 처를 납치하였다. 또 삼별초의 일부는 합포를 엄습하여 전선 20척을 불사르고 몽고인 봉졸 4명을 사로잡았다. 또 거제현을 엄습하여 전선 3척을 불사르고 현령을 납치하였다.
 원종 14년(1273년) 정월에 전라도 방호사 문경수가 아뢰기를 '적선 10척이 낙안군을 침공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 합포를 재차 엄습하여 전선 32척을 불사르고 몽고군 10여명을 사로잡았다.
 동년 3월에 탐진을 엄습하여 방수 산원 정국보 등 15명을 죽이고 낭장 오단 등 11명을 납치하였다.
 이상과 같이 탐라에 들어온 삼별초는 맹위를 떨치어 고려와 몽고를 괴롭혔다. 그 중에도 큰 타격을 입은 것은 몽고의 일본 정벌을 위한 조선 계획이다. 또 탐라의 삼별초가 건재하고 있는 이상 일본 정벌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고려와 원에서는 탐라의 삼별초를 회유하기 위하여 원종 13년(1272년) 4월에 초유사로 합문부사 금훈과 산원 이정을 탐라로 파견하였다. 그들은 역풍을 만나 보마도에 묵고 있었는데 삼별초의 김희취·오인봉·전우의 선단에 발각되어 금훈 등은 추자도에 억류되었다가 곧 풀려난다.
 금훈은 돌아와서 원제에게 아뢰기를 '회유는 불가능하므로 무력으로 평정하소서' 하였다. 그러나 탐라 진공은 해상 직전에 어려움이 있으므로 거듭 회유를 시도하게 하였다. 홍다구는 원제에게 아뢰기를 '김통정 일가 친족이 송경에 많이 살고 있으니 그들로 하여금 설득시키도록 하소서' 하였다. 그리하여 김통정의 조카 김찬과 이소 환문백 등 5인을 보내었는데, 김통정은 받아들이지 않고 김찬만 남기고 모두 참하였다.

 

삼별초의 영향 

 삼별초가 탐라에 미친 영향은 첫째는 서울 문물의 전래이다. 문화적으로 낙후된 이 지방에 귀일촌은 삼별초의 임시 수부이므로 문인과 명승들도 따라 왔을 것이고 성루의 언어 풍속까지도 전하여졌다.
 오늘의 제주 방언에 황해도 경기도의 말씨가 많은 남아 있는 것은 이러한 연유일 것이다.
 1935년 경 지금 항파두성 안의 경작지에서 불상이 출토된 일이 있었다. 이것은 물론 삼별초가 이곳에 와서 향수와 불우한 처지를 불심의 신앙으로 극복하고 불력에 의하여 무운장구(를 빌었던 호국불교의 유물이다.
 둘째는 산업상의 영향이다. 삼별초가 탐라에 들어와서 경제적으로도 자급자족을 위하여 벼농사와 양잠 등이 시작되었다. 우리 나라에 목면이 들어온 것은 공민왕 12년(1363년) 문익점이 원에서 목화씨를 가져오면서부터였고, 그 전에는 마포와 저포가 고작이었다.
 또 건축법과 요업 등의 보급이다. 삼별초의 궁전 건축과 축성법은 뛰어났던 듯하다. 지금에도 항파두리 성안에서 많은 와편이 출토되는데 그 경도가 돌과 다름없음을 볼 때 요업 기술이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째는 고려 무인들의 불굴의 호국정신이다. 당시 탐라에 들어온 삼별초가 고려 조정과 원을 상대로 대적할 여건은 도저히 못된다. 그러나 삼별초는 몽고인의 노예가 될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정신이었다.
 삼별초가 평정된 후에 탐라인은 몽고인에게 많은 괴로움과 시달림을 받게 되자, 비로소 그들의 호국정신을 흠모하며 그들을 영웅으로 받들고 신격화하여, 김통정에 대한 많은 전설과 민담이 만들어져 이 고장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항파두성이 난공불락이 성이었든지, 장수물은 김통정의 발자국에서 솟아나온 것이라든지, 그 주변에 거석이나 괴석이 있으면 삼별초 용사들은 용사들과 결부하여 민담을 만드는 것들은 모두 이러한데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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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냥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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