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에 대해

삼별초에 대해

작성일 2011.05.30댓글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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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숙제로 삼별초에 대해 조사해야 되서

내공100을 걸테니깐

짭고 정확하게 써주세요~> <

부탁드려요

(내공냠냠신고)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삼별초(三別抄)는 몽고 침략기에 그에 대항하던 고려의 무장 세력입니다.

 

원래 삼별초에서의 “별초”(別抄)란 ‘임시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의 일반명사, 일종의 유격대를 말하는 단어에서 유래했다.[2] 여기에는 정규군이 아니었다는 뜻도 담겨 있다.

삼별초는 처음에 최우가 도둑을 막기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에서 유래한다. 야별초는 1219년 최우가 권력 보호를 위해 조직한 사병이었는데, 뒤에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는 정규군으로 편성되었다. 그에 따라 야별초는 다시 좌별초, 우별초로 나뉘었으며, 몽고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오거나 탈출한 이들로 이루어진 신의군을 일컬어 삼별초라 불렀다.[2]

삼별초는 주로 경찰·군사 등의 공적(公的) 임무를 띠었으나 실제로는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이었다.

 

 

1231년부터 몽골 침략이 시작되자 최씨 일가와 지배자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떠난다. 1258년 김준최충헌의 증손 최의를 살해함으로써, 최씨 일가 독재를 종식시켰다.[2] 그러나 그 뒤에도 지배자는 김준에서 임연, 그리고 다시 임연의 아들 임유무로 무신 지배는 승계되었다. 원종은 비밀리에 몽골과 손잡았는데, 대세는 이미 몽골과 내통한 원종 쪽으로 기울었다. 1270년 음력 5월 원나라에서 귀국길에 오른 원종1270년 개경으로의 환도를 단행하였다. 이는 고려가 몽골에 속국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임유무는 황명을 거부한다. 그러자 원종은 삼별초를 회유하여 임유무를 암살하여 100년간 황권보다 더 강력한 권세를 휘두르던 무인시대는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2]

대몽항쟁

1270년 개경 환도가 임박하자 삼별초는 몽골과 결탁한 왕에게 운명을 맡길 수 없었고, 내부에서 동요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원종은 삼별초에게 해산령을 내리고 그들의 명단을 거둬오도록 지시하였다. 연명부가 몽골군의 수중에 넘어가면 삼별초는 전멸이었다. 1270년 음력 6월 초, 개경 환도를 앞둔 시점에서 삼별초의 지도자였던 배중손노영희 등 삼별초 지휘자들은 항전을 결정한다.[2]

삼별초는 왕족 승화후 왕온을 추대하여 황제로 삼고, 대 선단을 이끌고 진도로 도착했다. 당시 진도와 그 인근 지역에는 과거 최씨 정권이 소유한 농장이 그때까지도 존재하였으며, 대규모 몰려 있었다. 동시에 경상도전라도 지방의 세곡이 서울로 운송되는 길목에 진도가 속해 있었다. 이는 세곡으로 운반되는 식량과 자금을 빼앗아 자체 군량으로 쓰는 동시에 개경 정부를 압박할수 있는 요충지였다.[2]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는 '용장사'라는 절을 임시 황궁으로 삼았다. 그리고 용장사 주변에 산성을 쌓고 관아도 세웠으며 제법 도읍지의 면모를 갖추고 그들은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조정의 진압군은 속수무책이었고 삼별초의 위세는 진도 주변의 나주· 장흥에서 마산·김해·부산 등까지 남해안 일대를 석권하고 해상제국을 건설한다.[2]

그들은 또 고려의 정통 정부임을 자처하면서 일본에 사절을 교환하는 등의 외교활동도 하였다. 1270년 음력 11월 이르러 삼별초군은 제주도까지 점령하였다.[2]

종지부

1271년 음력 5월 · 연합군이 조직되어 세 방향으로 나눠서 진도를 공격해왔다. 삼별초는 진도의 관문이었던 벽파진에서 중군을 막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삼별초가 중군으로 들어오는 적을 막는 데 주력하는 동안, 그 틈을 타서 여몽 연합군의 좌군과 우군이 배후와 측면에서 기습 공격을 해왔고, 성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지휘자 배중손과 승화후 온은 살해되고 혼란에 빠진 삼별초는 피신하였다.

살아남은 삼별초 병사들은 김통정의 지휘 아래 혼란을 수습하고 제주도로 후퇴한다. 그 후 제주도에서 항거하며 일진일퇴가 거듭되었으나 1273년 음력 4월, 여·몽 연합군 1만여 명이 당도했다. 끝까지 버티던 제주 삼별초는 힘없이 무너졌다. 지휘자 김통정은 산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40년에 걸친 삼별초의 항전은 막을 내린다.[2]

역대 지휘자

  • 배중손 : (재위 : 1233년 ~ 1270년)
    • 배중손은 전 신의군의 우두머리로 삼별초에서도 지휘자를 맡아 삼별초를 총지휘했다. 40년을 총지휘를 하다가,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해 왕족인 승화후 온을 불러 양위한다.
  • 승화후 온 : (재위 : 1270년 ~ 1271년)
    • 삼별초의 정식 1대 국왕으로, 배중손에게 자리를 양위 받았다. 대몽을 하기 위해 강화도의 본산을 진도로 옮기면서 많은 노력을 했고 여몽연합군을 번번이 부서트리는 등 국왕의 업적을 남겼으나 여몽연합과의 진도 전투로 장수 배중손이 전장에서 죽으면서 결국 살해되었다.
  • 김통정 : (재위 : 1271년 ~ 1273년)
    • 진도 전투에서 살아 남은 군사들을 총지휘했다. 탐라로 이동하여, 성을 쌓는 끈질김에 여몽의 포기가 다가오고 삼별초의 승리가 코앞으로 다가왔으나 원나라일본 정벌 정책으로 인해 원 세조 쿠빌라이는 탐라를 차지하려 했다. 1만 병력의 여몽연합군이 쳐들어와 결국 삼별초는 깨졌다. 후에 고려는 원나라에 복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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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고려가 몽골에 항복할때 까지 마지막 까지 싸운 부대

처음에는 강화도에서 항전하다가

밀리고 밀려 제주도에서 끝까지 항전하다가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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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항쟁은 13세기 고려가 몽골에 대항하여 최후까지 항쟁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원래 삼별초는 고려 무인정권하 몽골군의 침입 직전인 고종 17년(1230) 경 집정자 최우()에 의하여 야별초라는 이름으로 조직된 고려의 군사조직이다. ‘별초’라는 말처럼 이들은 정예군으로 선발된 조직이었으며, 무인정권이라는 정치적 조건하에서 만들어진 조직이었던 만큼 친정권적 성격을 가졌다. 몽골군의 대대적 침략이 시작되자 삼별초는 자연히 고려의 가장 강력한 군사집단으로 부각되었으며,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그 규모 역시 확장되었다. 야별초가 ‘삼별초’라는 조직으로 바뀌는 것 또한 이러한 조직 확대의 결과였다. 원종 11년(1270) 강화도의 삼별초는 몽골에 복속하여 개경으로 환도한 원종의 고려정부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였다. 이들은 몽골에 복속한 개경정부를 전면 부정하고, 새로 조직한 그들의 정부야말로 고려의 정통정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장군 배중손, 야별초 지유 노영희를 중심으로 하여 강화도에서 봉기한 삼별초는 6월 강화도로부터 진도로 이동하여, 용장성을 구심점으로 개경정부와의 대결을 기도하였다. 이들은 구 후백제 지역과 남부 해안지역의 연안 해양세력권 구축을 통하여 개경정부 및 몽골과 대결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몽골의 압력에 대응하는 방편으로 일본과의 공동전선 구축을 시도 하였다.

진도의 삼별초군이 벌인 활동양상은 진도 입거 이후 거점세력의 확보를 위하여 대략 3단계로 작전을 확대시켜 나갔다. 즉 초기에는 전라도 연해 지역의 세력 확보에 주력하였으며 제2단계로는 후방의 배후지가 되는 제주도의 확보, 그리고 3단계는 경상도 남부 연해지역 일대에 대한 지배권의 확보였다. 그리하여 진도를 중심으로 전라, 경상 연해 지역에 대한 일정한 세력 확보에 삼별초는 성공한다. 남부 연안 지역은 대체로 풍부한 물산지대인 데다 이들 물산의 운송로를  포함하고 있어서 진도측의 이같은 연안장악으로 개경측의 타격은 자못 심각하였다. 진도를 거점으로 한 삼별초는 진도 이외에 남해안의 완도, 남해도 등 주변 여러 도서에 세력을 부식하였고 제주도를 배후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완도의 송징, 남해도의 유존혁() 등이 그 예이다.

진도의 삼별초군은 여러 차례 여몽연합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개경정부를 위협하였다. 그러나 원종 12년(1271) 5월 김방경()과 흔도(忻 몽고장수), 홍다구()가 지휘하는 여몽 연합군의 공격에 의하여 패퇴하고 말았다. 진도전투에서 장군 배중손이 전사하고 왕으로 옹립된 승화후 온()이 생포되어 참수되었으며 삼별초 진도정권은 봉기한 지 1년 만에 붕괴되었다. 그러나 삼별초의 잔여세력은 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원종 14년(1273)까지 항전을 지속하였다. 북제주군 애월읍 소재 항파두성은 당시 제주 삼별초의 거점이었다. 이들은 애월항의 입구에 목성()을 쌓고 해변에는 장성()을 돌로 쌓아 여몽연합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김통정()이 배중손을 대신하는 새로운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제주에서의 삼별초는 처음 1년 동안 자체적인 조직 정비 및 방어시설의 구축에 주력하였고 이후 약 반년 간은 삼별초의 원래 본거지였던 전라도 연해안에 대한 군사활동 전개를 거쳐 점차 그 활동이 충청 경기 연해안까지 확대되어 개경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여몽연합군의 조직적 공략에 의하여 원종 14년(1273) 4월 제주 삼별초 역시 무너지고 말았다. 삼별초의 항전은 고려 대몽항전의 최후를 장식한 것으로서 이후 고려는 14세기 중반까지 원의 정치적 관리 하에 놓이게 된다.

삼별초 항쟁 경과
1270.6.2 강화도에 주둔하였던 삼별초군은 1천여 척의 선박으로 진도로 이동.
1270.8.19 진도 벽파진에 삼별초군 상륙.
1270.9 김방경이 몽고군과 진도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함.
1270.12.22 재차 진도를 공격하였지만 실패함.
1271.4 몽고장수 흔도가 주도하여 진도를 공략함
1271.5 진도에 상륙한 고려관군과 몽고군이 총공격을 감행함.
       배중손은 전사하고 김통정은 제주도로 후퇴함.
1272.2 김통정은 제주도 애월에 성을 쌓고 전력을 재정비함.
1273.4 고려와 몽고 연합군이 제주도를 공격하여 삼별초를 멸망시킴.
 
이상허접한답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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