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에대해

삼별초에대해

작성일 2007.10.20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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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몽고침입당시왕과 태자[어릴때이름& 나중에이름] ,귀족들[ex.연씨집에호게] ,년도[ex.고종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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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고려 정부가 몽고에 굴복하고 개경으로 돌아온 뒤, 왕실과 문벌 귀족, 무신들은 한결같이 더이상 몽고와 싸운다는 생각을 못하고 철저하게 몽고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또 그에 앞서 대몽 항쟁을 거의 떠맡다시피 했던 농민과 천민의 항쟁도 상당히 수그러 들었습니다.

그런데 삼별초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대가 개경 정부에 반기를 들고, 대몽 항쟁을 계속 벌였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장기전을 펴기 위해 진도로 옮겨 저항을 계속했으며, 그 일부는 다시 제주도로 가서 마지막까지 싸웠습니다. 이 부대를 삼별초라고 합니다.

이들은 과연 무엇을 하는 부대였을까요? 삼별초란 이름만 보아도 이 부대는 뭔가 특수한 임무를 갖는 부대인 것 같은데, 무신 정권 밑에서 특수 부대는 당연히 특권을 누렸을 만합니다. 그런데 왜 삼별초는 개경 정부에 저항하는 봉기를 일으켰을까요?

삼별초는 야별초의 좌, 우별초와 신의군을 함께 일컫는 말입니다. 야별초는 최씨 정권의 2대 집권자인 최우가 수도의 치안을 맡기려고 특별히 편성한 군대이었습니다. 그 무렵 농민과 천민의 봉기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무신 정권으로서도 특별한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의군은 대몽 항쟁의 과정에서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온 사람들로 구성된 부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군은 몽고에 대한 적개심이 유달리 컸습니다.

조선 시대의 실학자인 성호 이익은 야별초가 조선 시대의 포도군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경찰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고려 시대에는 수도 치안을 맡는, 오늘날의 경찰과 같은 기구로서 금오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도의 방위를 맡는 군대로서 오늘날의 수도방위사령부와 같은 3위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야별초는 수도의 치안을 맡되 반란이나 봉기를 진압하는 일을 전담하는 특수 부대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학생들의 시위나 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는 임무를 전담하면서 악명을 떨쳤던 백골단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밖에도 야별초는 정변 때마다 동원되는 병력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늘날의 공수 부대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야별초는 강화도에서 정변에 동원되어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에 결정적인 구실을 했습니다. 최씨 정권이 스스로 키운 야별초 때문에 무너졌다는 사실은 정말 재미있는 일입니다.

고려 정부가 강화도에 틀어박힌 기간이 길어지면서 최씨 정권이 약해지기 시작하자 다른 무신들이 슬슬 권력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무신 정권에 눌려 꼼짝도 못하던 왕실이나 무신들도 몽고 침략으로 최씨 정권이 궁지에 몰리자 몽고의 힘을 빌려서라도 정권을 되찾겠다는 계략을 꾸미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258년 3월 무신 김준이 문신 유경 일파와 손을 잡고 최씨 정권의 4대 집권자인 최의를 죽이고 정권을 차지했습니다. 이들이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는 정변에 동원한 군대가 바로 야별초였습니다. 이때쯤에는 최씨 정권이 너무 무능하고 몽고에 대한 투쟁 의지는 없는 채 강화도에 눌러 앉아서 방탕과 사치로 세월을 보내자 야별초도 최씨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상당히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김준 정권도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또다른 무신인 임연이 김준을 제거했고, 임연이 곧바로 죽자 그의 아들 임유무가 정권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나 임유무는 무신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신들끼리 치고받으며 겨우 10여 년 사이에 세번씩이나 정권이 바뀌는 동안 친몽고파들이 왕실을 등에 업고 몽고의 힘을 빌려 개경으로 돌아갈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마침내 송송례, 홍문계 들이 임유무를 죽이고,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돌아가 몽고와 화평 교섭을 맺고는 사실상 그 지배로 기어들어갔습니다. 이때부터 무신 정권은 무너지고 몽고의 손아귀에 있는 왕실이 문신들과 함께 새로운 집권자가 되었습니다. 그때가 1270년, 몽고의 첫 침략이 있고난 지 38년, 무신 정변이 일어난 지 10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삼별초는 만든 목적과, 임무의 특수성 때문에 정치적 사안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할 나위 없이 무신 정권이 안정되었던 기간에는 삼별초는 그 친위 세력이었고, 농민과 천민의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부대였습니다. 그리고 야별초는 강화도에서 정변이 일어나는 동안 계속 동원되었습니다.

그들은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권력 야욕에 눈이 먼 무신들의 이용 대상이 되었습니다. 삼별초의 나머지 하나인 신의군 역시 대몽 항쟁의 과정에서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온 전력 때문에 몽고 지배의 기간에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삼별초는 무신 정권의 친위 세력이기는 하였으나, 출신은 거의 다 농민 또는 천민이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군대에 들어가는 것이 생계 보장과 출세에 유리했기 때문에 농민이나 천민 중에서 힘이 세고 무예에 자신 있는 사람들은 삼별초에 지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들에게 보장되던 특혜가 사라지게 되는 순간에는 언제든지 농민 또는 천민의 이익을 위해서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무렵의 상황에서 삼별초는 본격적인 군사 작전을 펼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예 부대였습니다. 그 때는 전시과 제도가 무너지고 대토지 소유자들이 군인전을 강탈하면서 도망하는 병사가 속출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더구나 무신 정권이 도방을 중심으로 정권을 지키기 위한 사병을 강화하고 정규군은 괄시했기 때문에, 정규군은 노인이나 약골들만 남아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정예 병사들로 구성된 삼별초의 용맹함과 전투력은 견줄 데가 없었습니다. 또 봉기를 일으킨 뒤에는 다른 봉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강하게 저항하였습니다.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돌아가고 삼별초가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며 봉기를 일으키자 이 봉기에 동참하려고 강화도로 많은 민중이 몰려들었습니다. `제왕운기`를 쓴 이승휴는 이때의 상황을 "개경으로 환도할 때 불량한 무리들이 까마귀떼처럼 강화도로 모여들었다"고 표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진도에 수도를 세우고 본격적인 대몽 전쟁에 들어갔을 때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만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삼별초 정부를 지지하는 많은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경남 밀양의 당시 지명은 밀성이었습니다. 1271년 1월에 이곳 밀성 사람들이 봉기해서 부사를 죽이고, 인근의 청도와 선산에까지 진출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명분은 진도의 삼별초 정부에 호응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개경에서도 봉기가 모의됐습니다. 관아의 노비들이 무리를 모아 관직자를 죽인 뒤, 진도에 가서 삼별초가 세운 정부에 합류하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개경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천 앞바다에 위치한 대부도에서도 민중들이 봉기를 일으켜, 당시 여기에 주둔 중인 몽고병들을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왜 민중들은 삼별초를 그토록 지지한 것일까요? 몽고 침략에 대해 농민과 천민들이 주로 항전하였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항전이 장기화하면서 이들의 항전은 수그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몽고는 가혹한 징발로 민중을 수탈하였습니다. 그리고 개경 정부는 그 하수인 노릇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스스로 항전을 조직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민중들은 누군가가 나서주기만 하면 언제든지 발벗고 나서서 호응할 태세였습니다. 그때 마침 삼별초가 대몽 항쟁의 횃불로 선봉에 나섰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의문을 짚고 넘어가 볼까요?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몽고 침략의 위기를 경험한 들이 민족적 자주 의식을 바탕으로 썼던 책 중 하나라고 꼽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삼별초의 봉기에 동참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불량한 무리`라고 표현했을까요?

삼별초가 세운 정부는 이전의 고려 정부나 그때 개경에 있던 정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혁명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노비 문서를 불태우는 일이었습니다. 삼별초가 노비 문서를 불태운 것은 노비들의 호응을 얻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였지만, 앞에서도 보았듯이 그들의 다수가 농민 또는 천민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조치는 민중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지배층들에게는 극도의 거부감을 주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나름대로 민족 자주 의식에 눈을 떠 가던 인 이승휴가 대몽 항전에 나서려고 하는 사람들을 `불량한 무리`라고 일컫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왜 진정으로 민족 자주를 생각하는 사람은 민족 내의 평등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 민족사를 보면 이 시대 이후로 민족 자주와 평등 사상은 거의 궤를 같이 하여 왔습니다. 이런 점은 우리에게 오늘날의 민족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삼별초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새 정부를 수립하고, 어떤 활동을 하였으며, 그 결말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이들의 항전이 어떠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개경 정부의 환도에 맞춰 강화도에서 봉기를 일으킨 삼별초는, 근거지를 진도로 옮긴 뒤 그해 6월 1일 배중손, 노영희 들이 주도해서 새 독립 정부를 세우고, 11대 문종의 동생인 평양공 기의 직계 후손인 승화후 온을 황제로 받들었습니다. 이들이 개경 정부와 대립해서 수도를 따로 만들고 새로운 황제를 받들어 세운 것은 이전의 봉기들과는 다른 특징입니다.

물론 이들은 고려 왕조나 봉건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지닌 역사적 한계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다른 봉기와는 달리 외세에 굴복한 왕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자신들의 봉기를 단순한 항거의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 대안으로 보여주는 차원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삼별초의 투쟁도 보람없이 진도 정부는 이듬해 5월에 몽고와 고려 연합군의 공격으로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삼별초가 진도를 수도로 정한 것은 그곳이 몽고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삼별초는 몽고와 고려의 연합군을 여러 차례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00척이 넘는 전함으로 쳐들어오는 몽고와 고려 연합군의 물량 공세 앞에서 결국 패배하고 맙니다. 이 패배로 황제인 승화후 온과 그의 아들 수사도 환 그리고 반란의 지도자 배중손, 노영희 들이 모두 처형되었습니다.

진도 정부가 함락된 뒤 삼별초의 나머지 세력은 김통정의 지휘로 제주도에 가서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었습니다. 제주도에 자리잡은 삼별초군은 안팎에 튼튼한 성을 쌓고 싸울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그런 다음 추자도, 거제도, 흑산도들을 점령하여 남해안 일대에서 활동할 전초 기지로 삼았습니다. 그 뒤로 2년 가까이 삼별초군은 남해안은 말할 것도 없고 멀리 중부 해안까지도 출몰하면서 몽고군과 고려 정부군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1273년 4월 28일 만여 명의 병력과 160여 척의 전함으로 총공격을 해온 몽고와 고려 연합군에게 끝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이때에도 삼별초는 여러 가지 힘든 조건 속에서도 용감히 싸웠으나, 몽고와 고려 연합군의 대대적인 물량 공세 앞에 중과부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중 봉기를 가혹하게 진압하는 등 무신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삼별초가, 이미 고려 정부는 항복했는데도 스스로 몽고에 대한 항전을 펼쳐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반외세 투쟁의 선봉에 섰다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삼별초의 항전은 비록 몽고군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몽고와 개경 정부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습니다.

몽고는 삼별초의 항전 때문에 두 번이나 노려보았던 일본 침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을 침공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게 됨으로써 민중에 대한 가혹한 수탈이 어느 정도 풀렸습니다. 또 몽고는 삼별초의 항전을 진압한 뒤 서둘러서 고려에 대한 지배 체제를 가다듬기 시작했습니다. 삼별초의 반란은 대몽항쟁 기간 동안의 농민, 천민들의 항전과 함께 몽고의 고려 지배가 간접적인 지배에서 머무르도록 쐐기를 박는 구실을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도 해안가에 있는 굴포리 어귀엔 삼별초를 이끌었던 배중손의 사당이 있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지금도 매년 정월 보름이면 당제를 지냅니다. 민중들은 700년이 훨씬 지난 오늘까지도 항전의 주역을 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곳 주민들에 국한되는 것은 그 뒤 오랜 역사 동안 우리 민족의 지배층이 진정한 민족 자주 의식을 가진 세력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처럼 민족을 위해 온몸을 바쳐 싸운 이들의 정신은 민중들 속에서 면면히 이어 오고 그것이 오늘 우리를 있게 한 강인한 민족 정신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민족 정신의 정통으로 되살리고, 많은 이들에게 특히 우리의 후대들에게 온전히 전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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